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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BAC Aug 26. 2021

꽃잎이 피고 또 질 때면

아름다운 나이 오십

<꽃잎이 피고 또 질 때면 >


긴 겨울의 여운을 한 몸에 흠뻑, 꽉 찬 흰 백색을 가득 머금은 체 몸이 으스러지도록 꽃잎을 열었나 싶은 순간, 당황스러우리만큼 뚝 ! 세상에서 가장 처량한 모습으로 길 바닥에 나 뒹구는 꽃이 목련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목련만큼이나 처량하지는 않아도 지 성질에 못 이겨 잔인한 붉은 빛을 품은 체 봄볕에 몸을 던져버리며 자기몸을 사르는 매서운 아가씨가 바로 동백이렷다. 누구는 절규하며 겨울아 안녕을 외치고 또 누구는 봄을 찾아 고개를 내미는 계절이다.  


이제 며칠만 이렇게 지나가다 보면 쌀쌀한 봄기운과 함께 봄의 전사들이 하나 둘 눈을 뜰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아주 잠시 동안이지만 산을 넘어서 학교에 갔던 적이 있었다. 가방을 등뒤에 짊어지고 학교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꼭 산언저리 어딘가에서 발길을 멈추어 섰다. 그리고는 땅강아지도 잡고 뻐꾸기도 잡았다. ‘뻐꾹아 뻐꾹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그렇게 뻐꾸기를 찾다보면 저어기 멀리서 뻐꾸기 소리가 들려왔다. 뻐꾹 뻐꾹 뻐꾹 그 평화로웠던 뻐꾸기소리는 어느새 먼 기억 속으로 함께 사라져 버린 것인지 요즘에는 뻐꾸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땅강아지를 잡으려면 고운 흙길을 찾아내야만 했다. 그리고 땅강아지가 남긴 가느다란 소인국 사람들의 오솔길처럼 생긴 길을 따라 쫓아가다보면 그 언저리 어딘가에서 흙무덤을 소복하게 만든 땅강아지를 잡을 수 있었다. 나는 땅강아지를 잡는데 선수였다. 땅강아지를 많이 잡아도 뭐 하나 쓸 곳이 없었지만 그저 잔뜩 잡아 손에 움켜쥐고 또 다른 땅강아지를 찾아 산 곳곳을 헤매곤 했다. 그렇게 손에 움켜쥔 땅강아지는 내 손아귀에서 간질간질 손을 간지럽혔고 손끝으로 전해오는 땅강아지의 간지럽힘에 꺄르르~~ 웃음소리를 내다가 귀여워서 다시 놓아주기도 했다.


그렇게 계절을 맞고 또 계절을 보내다보면 어느새 산에는 조그맣고 빨간 열매들이 하나 둘 열리기 시작한다. 새콤하고 달콤하고 색깔마저도 너무 예뻐서 매혹적인 열매 보리수. 언뜻 멀리에서 보면 겉은 회색빛 점박이 천을 두른 듯 거무죽죽한 붉은빛이 돈다. 게다가 표면은 땡땡땡 하얀 점들로 가득 채워져 있어서 잘 보이지도 않아 눈이 좋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되는 보리수는 산 속에 있는 열매 중 내가 최고로 좋아하던 열매였다. 열매를 따서 씻지도 않고 바로 입 속에 넣으면 톡 하고 터지는 새콤한 맛에 움찔 하면서도 멈추기란 쉽지가 않았다. 보리수는 한 알 한 알 얄밉게 따먹는 아이들이 있는가하면, 나처럼 한 주먹 가득히 따서 한꺼번에 입을 오물거리며 먹어야 보리수의 그 오묘한 맛을 입안 한 가득 느낄 수 있어서 꼭 한 주먹을 모아 한 입에 훅 털어 넣어 먹는 아이들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랬던 아이들이야 말로 오늘날 나처럼 맛집을 찾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렇게 한참을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머물다 보면 어느새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아쉬운 시간이 온다. 그러면 나는 또 그 보리수나무를 두고 집으로 돌아가기가 아까워 커다란 나무 가지를 툭 꺽어서 집으로 질질질 끌어서 가져오곤 했다. 그러다가 개 복숭아가 열리고 또 그러다가 지금은 잘 보이지도 않는 고야가 열리고 그렇게 자연을 맞으며 계절이 변하는 것을 맞았던 기억이 난다.


어릴 적에는 언제나 꽃이 많은 우리 집이 신기했다. 엄마 손은 정말 마술 손 같이 느껴졌고, 어쩜 저렇게 많은 꽃들을 키울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엄마 나이가 되니 엄마 집은 꽃이 점점 줄어들고 우리 집은 옛날 우리집 마당처럼 한가득 꽃을 채우고 있다. 꽃을 키우는 것도 결국은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다. 아이를 키우듯 물을 주고, 병이 들었는지 살펴보고 영양제도 가끔씩 주어야 하고, 너무 물을 많이 줘서도 안 되고 또 너무 적게 줘서도 안 된다. 엄마의 화려했던 시절은 그 시절 그 꽃들과 함께 사그러져버렸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 별다른 낙이 없다고 하는 나이가 되었다. 내가 어른이 되면 엄마가 나한테 못됐게 한 거 다 갚을 거라고 막말을 퍼부었던 그 입이 참으로 죄스러워지는 나이이다.


오십대 가장 화려하고 활짝 핀 나이.

나는 지금 그 화려하고 아름다운 나이 오십대이다. 너무 덜 익어 푸석한 빛깔도 아니고 잠시 입안을 황홀하게 만드는 신맛도 단맛도 아닌 쌉싸름한 여운의 먹먹한 나이. 어떠한 일도 덤덤히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참아낼 수 있는 나이. 내가 아닌 당신의 기분을 조금은 맞춰줄 수도 있는 나이. 채우려고 욕심내지 않아도 어느 새 채워진 모습에 스스로 비워낼 준비를 하는 나이. 내 촌스러움이 너무 세련된 사람 앞에서 기죽지 않고 더 당당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 있는 나이. 가끔은 뒤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있는 나이. 오십은 참 탐스러운 나이이다. 100세를 넘으니 인생을 조금은 알 것 같다고 하신 김병기 화백님의 말씀 앞에서 오십쯤이야 어린애로 보이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나는 이 오십대를 가장 아름다운 나의 시절로 만들어 보려고 한다.   


이 아름다운 나이에 베란다에 뚝뚝 떨어지는 동백꽃을 그냥 버리기가 아까워 무엇을 할까 고민을 하다가 이제는 이런 호사를 조금은 누려도 되지 않을까 싶어 나에게 멋진 선물을 주자고 생각한 것이 바로 욕조에 꽃잎을 한가득 띄워 동백향을 맡으며 와인 한 잔을 해야지 하고 생각했다. 욕조에 물을 받고 허브 오일도 조금 뿌리고 그 위에 동백 꽃잎을 흩뿌렸다. 따뜻한 물의 온도와 마침 삐그덕 거리는 목 디스크로 인해 많이 피곤해 있는 상태라 꽤 괜찮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욕조에 화려한 오십대가 몸을 담궜다. 처음 3분은 좋았고, 3분이 지나가자 꽃잎을 치울 생각에 오십대에게는 두통이 오기 시작했다. 체로 걸러내면 가장 쉽겠지만 그렇다고 국수 삶는 그릇을 욕조에 넣는다는 건 이십대도 아닌 오십대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냥 손으로 건져내는 편이 낫겠다 생각하는 순간 이미 오십대의 손은 꽃잎을 건져내고 있었다. 더 이상 꽃잎이 보이지 않기에 이제 다 되었나 보다 하는 순간 머리카락에 붙어있던 꽃잎 하나, 팔뚝에 붙어있던 꽃잎 하나, 얄밉게도 하나씩 눈에 나타난다. 드디어 욕조에 단 하나의 꽃잎조차 보이지 않게 깨끗하게 되자 비로소 미소가 환하게 생긴다. ‘꽃잎 욕조’는 오십대의 환상이지만 그렇다고 그 환상만으로 살 수도 없는 나이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일거리가 있고 깨끗하게 정리해야 하는 몫들이 고스란히 남겨져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의 적절한 긴장감을 유지해야하는 나이이기도 하다. 그것은 단지 꽃잎 욕조뿐만이 아닐 것이다. 인생에서의 그런 템포도 조절이 가능한 오십대.


그리하여 오십대의 꽃잎 욕조 스펙타클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리고, 그렇게 허무하게 끝난 꽃잎 욕조의 여운을 조금 더 간직하고 싶어서 꽃잎 더미에 빨간 촛불을 켰다. 환한 빛과 붉은 동백꽃잎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빛으로 온 집안을 밝힌다. 꽃잎이 피고 또 질 때면 그날이 또 다시 생각나 못 견디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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