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 변경에 지사 변경까지 이루어졌다. 낯선 지역으로 이사를 하고 새로운 지사로 첫 출근을 하였다.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곳이었다. 새로운 지사에서도 나는 막내였다. 회사에 입사한 지 가장 최근인 사람, 나이가 가장 어린 사람. 모든 분들이 나를 막내로 그리고 신입으로 대해주셨다. 그렇게 나는 다시 신입이 되었다.
업무를 배정하는 부서 회의에서 손을 번쩍 들었다. 외부고객과 관련 없는 내부적인 일을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우리 부서는 외부고객과 관련 없는 일이 대부분인데, [회계와 서무]를 해본 적 있느냐고 부장님께서 물으셨다. “아니오. 해본 적 없지만 해보겠습니다.” 대답했다. 부장님께서는 우리 부서에 인원이 부족하니 둘 다를 담당하라고 하셨다. “네” 말씀을 드리고 자리에 앉으니 막막했다. 두 업무 모두 처음이라서.
특히 회계업무가 낯설어도 너무 낯설다는 문제가 있었다. 차변, 대변, 대차대조표, 일계표, 당좌, 지출, 수입결의서, 대체결의서, 부가세 신고..... 규정을 읽어봐도 하나도 모르겠다. 주말에 서점에 가서 회계책을 샀다. 경리초보자들이 궁금해하는 회계, 초보자를 위한 경리회계 실무서 등 3권을 샀다. 읽어보았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소득도 없이 불안감만 더 높이 쌓아 올린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에 출근하자마자 회계업무 경력이 있으신 다른 부서 직원분을 찾아갔다. 처음 뵙는 분이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처음부터 설명 좀 해주세요. 가나다처럼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날마다 주마다 매달 빠뜨리면 안 되는 것들 모두 가르쳐주세요.” 정말 죄송하였지만 오전을 지나서 오후까지 내내 붙들고 질문에 질문을 이어갔다. 내가 불쌍했는지, 안쓰러웠는지, 원래 마음이 좋으신 분이셔서 싫은 내색 한번 안 하시고 하나하나 설명을 해주셨다. 그 이후로도 확신이 들지 않거나 새로운 상황이 등장할 때면 어김없이 도움을 요청했고 한결같이 응해주셨다. 회계는 정말 긴장되는 일이었다. 숫자 하나라도 잘못되어 일계표가 맞지 않으면 잔액이 맞지 않으면 예산과목이 일치하지 않으면 규정에 어긋나게 집행하면 낭패였다. 금액 하나하나 천천히 확인하고 차변 대변 확인하고 규정 마지막으로 한번 더 확인하고 정말 확인에 확인을 거듭해야 했다.
나의 본격적인 야근이 시작되었다. 낮 동안 은행까지 다녀와야 하기 때문에 오전과 오후 3시까지는 회계업무를 처리했다. 내가 의뢰한 일을 은행직원이 처리하는 동안 앉아서 기다리는 그 시간 동안, 제대로 하고 있는지에 대한 불안감,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 수 있을까에 대한 절망감으로 마음이 복잡했다.
은행 다녀온 후 회계업무를 마무리하고 나면 서무업무가 시작되었다. “서무업무가 정말 짜증 나는 일이지만 한 번쯤은 해 봐야 하는 일이다”라고 선배님들은 종종 말씀하셨었다. 우리 기관의 전체를 아우르는 기본적인 일이므로 한번 담당해 보면 알게 모르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니 꼭 해보라고 하셨다. ‘그래 다 해보자. 도움이 되는 일이라잖아.’ 그런데 참 이상했다. 뭐 하나 떡하니 성과를 드러내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안 하면 빈 곳이 티가 나는 양상이었다. 집안일 같은 그런 존재.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일 수 있으나 하는 사람의 정성에 따라 달라지는 그런 일. 문서 접수-발송, 직원 교육, 외부기관과 연계된 행사, 기관 특화 업무, 회의자료 작성, 담당자가 명확하지 않은 일들은 모두 서무의 일이었다. 만물상.
서무와 회계 업무를 담당하다 보니 직원들과 모나지 않은 관계가 참 중요했다. 대부분 좋은 분들이셔서 부딪히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많이 도와주시고 많이 알려주셨다. 부장님만 제외하고.
부장님은 참 특이한 분이셨다. 감정 조절의 어려움을 가장 큰 특징으로 가지고 계신 분.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은 컬러프린터 토너 구매 건이다. 큰 행사를 앞두고 부장님께서 컬러로 출력을 하라 하셨다. 꽤 많은 매수를. 그런데 컬러 토너가 부족하다고 프린터기에 메시지가 떠서 컬러 토너를 구매하겠다는 품의를 올렸다. 부장님께서 갑자기 버럭 화를 내셨다. 이렇게 비싼데 왜 사냐고 하셨다. “부장님께서 컬러로 출력하라고 하셔서 출력하려고 하는데 토너가 없으니 구매하려 합니다.” 말씀드렸다. 회사 돈이라고 이렇게 함부로 써도 되는 거냐고 하셨다. 회사 일 하는데 회사 돈을 쓰지 그럼 제 월급으로 사나요라 말할 수 없어서 “그럼 컬러 출력을 어떻게 할까요?” 했더니 혀를 차시면서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 어쩌라는 것인지. 그리고 왜 나에게 화를 내시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턱대고 비싼 제품으로 품의를 올린 것도 아니고 가격조사해서 가장 합리적인 선에서 품의를 올렸는데 이제 어떡해야 하지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부장님께서 회의실로 들어오라 하셨다. 회의실에 들어갔더니 말대꾸는 나쁜 거라고 하시면서 아직 어려서 뭘 잘 모르는데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고 한참을 나무라셨다. 그 표정과 말투... 엄청 상처받았다. 할 말이 없었다. 말대꾸라... ‘부장님께서 컬러로 출력하라고 하셔서 출력하려고 하는데 토너가 없으니 구매하려 합니다. 그럼 컬러 출력을 어떻게 할까요?’ 이 두 마디가 말대꾸였단 말인가. 이렇게 말하면 잘못된 것인가? 그럼 뭐라고 말씀드려야 정답인 거지? 자리에 돌아와 앉았는데 그날따라 미쳐버릴 것 같다는 말이 이런 느낌을 두고 하는 것인가 싶었다. 일을 할 자신이 없었다. 휴가승인서를 들고 부장님께 같다. 왜 갑자기 휴가를 내냐고 물으셨다. 나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흘렀고 부장님이 못마땅하다는 듯, 귀찮다는 듯, 멋대로 하라는 듯 서명을 하시면서 또 한 번 혀를 차셨다. 가방을 들고 나와 거리를 무작정 걷다가 아로마테라피 가게로 들어가 진정효과가 있는 디퓨저를 사고, 영화관을 들어가 가장 빨리 볼 수 있는 영화표를 사서 들어갔다. 무슨 영화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슬프지도 않은 영화를 보며 나는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다.
다음날 무표정한 얼굴로 출근하였다. 부장님이 회의실로 부르셨다. 어제는 본인이 너무 과했다. 다른 일로 스트레스받은 게 있어서 그랬다. 이해해라. 하셨다. 네에.. 말씀드리고 자리에 앉아 일을 시작했다. 어제 자리를 비워서 그런지 일은 많이 쌓여 있었다. 그래서 딴생각할 새 없이 일단 정신없이 처리하다 보니 또 밤이 되어 있었다.
부장님의 이상한 방식 중에는 같은 건의 일을 직원 모두에게 동시에 지시하시는 것도 있었다. 한 명 한 명 따로 불러서 업무지시를 하신 터라 우리 팀원들은 우리가 같은 건의 일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처음에는 몰랐다. 담당업무가 아니더라도 지금 이 건의 일이 시급하니 처리를 하라는 지시사항을 받고 모두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부장님은 우리가 완료한 일 중 가장 먼저 제출받았거나 가장 마음에 드는 직원의 보고서를 채택하는 방식이었다. 어느 날 팀원들만 모여 차를 마시다가 우리가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 예전에도 몇 번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했다. 제일 선임자가 부장님과 면담 후 이 방식은 사라지게 되었다. 팀원들 간의 소통도 더 끈끈해져서 본인 담당이 아닌데 부장님이 지시하는 건이라면 우리끼리 공유하는 방식으로 크로스체크를 하기도 하였다.
부장님의 특이한 방식은 근무하는 동안 내내 크고 작게 이어졌다. 처음에 무방비 상태에서 한방 두방 맞을 때는 정신도 못 차리고 상처만 받았는데 살고자 하는 나의 본능으로 대처능력이 조금씩 쌓여갔다. 아무리 나이 어리고 근속연수가 짧더라도 사람에 대한 기본 예의에서 벗어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인격 모독. 그래서 드려야 할 말씀은 하는 연습을 했다. 처음에는 목소리도 떨리고 작고 어물어물했다. 말할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해서 말씀드리는 연습을 여러 번 한 후 부장님께 말씀드리러 갔다. 불만, 툴툴거림, 무례함이 없도록 정중히 말씀드려야 한다는 기준을 명심하며 실천해 보았다. 계란으로 바위를 칠 수는 없지만, 수적천석이라고 부장님도 점점 나를 함부로 대하는 태도를 자제하기 시작했다. 직원들 눈치를 보기 시작하신 것이다. 나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우리 부서의 모든 직원들이 나처럼 부장님과의 관계에서 삐걱거림이 발생하다 보니 한분 두 분 심각한 면담(항의)을 요청하셨고 트러블메이커 부장님께서 위기의식을 느끼셔서 변화되셨을 확률이 높다.
부장님과의 갈등은 그렇게 흘러가고,
업무는 [낮-회계, 밤-서무] 구조로 계속 이어가다 보니 힘에 부쳤다. 처음에는 업무가 익숙하지 않고 긴장된 상태로 배우면서 일하다 보니 몸이 아픈 줄도 모르고 살았다. 3개월쯤부터 두통과 복통이 찾아왔다. 책상 서랍에는 두통, 복통, 알레르기비염 약이 항시 자리하고 있었다. 식사를 제대로 하기도 힘들어 병원을 찾았다. 의사 선생님이 과로가 심각하다고 잘 먹고 잘 쉬라고 하셨다. 부장님께 면담 요청을 드리고 싶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면 업무가 익숙해져서 점점 나아지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달리 방도가 없어 나의 회사 생활은 그대로 이어졌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어느 날 지사장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왜 매일 혼자 남아서 야근을 하느냐 물으셨다. 퇴근 후 운동 끝내시고 자택으로 돌아가시는 길에 우리 사무실 앞을 지나가시는데 그때마다 네가 야근을 하고 있더라고 하셨다. 말씀드렸다. 낮에는 회계업무하고 저녁에 서무 업무하느라 그렇습니다. 그래 알았다. 그러시더니 다음 인사 시즌에 우리 부서에 인원 1명을 충원해 주셨다. 나는 회계업무에서 탈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