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12년지기,
나보다 몇살 어린 친구가 있다.
친구라 하기엔 조금 특별하고,
동료라 하기엔 조금 더 깊다.
그래서 나는 그냥 그녀라고 부른다.
그 말이 가장 잘 어울리니까.
그녀와 나는
1호, 2호 아이들의 나이도 같고
한 직장에서 아이들을 함께 키우며
세월을 나란히 걸어왔다.
나의 가정사와
자녀 문제까지 모르는 게 없는,
말하자면 우리 집의 산증인 같은 사람이다.
그녀를 만나면 참 쿨하다.
그리고 위트가 있다.
원래 나는 뭐든 깊게 생각하는
진지 모드 인간이라
그녀를 만나고 나면
생각이 한 번씩 리프레시 된다.
내게는 너무 웃긴 사람이다.
그녀의 삶도
그리 평탄하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단단하게 붙잡고
차근차근 해결해 나간다.
자녀를 키우면서
나는 늘 이렇게 말한다.
“나 지금 긴 터널 지나가는 느낌이야.”
그러면 그녀는 말한다.
“나는 터널에서 사고가 크게 났는데
렉카차가 안 오는 상황이야.”
그 말에
또 빵 터져 웃는다.
어려움을
이렇게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그녀만의 마력.
요즘 그녀는 많이 바쁘다.
터널 끝에서 소란스럽던 일들을
하나씩 마무리하며
열심히 상황을 수습하고 있다.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
긍정적인 사고로
결국 잘 해결해 낼 거라는 것을 믿는다.
참 씩씩한 사람이다.
자기 말로는
자기가 소띠라고 한다.
그런데 소띠에도 종류가 있단다.
농번기 소띠가 있고
밤소가 있고
낮소가 있는데
자기는 농번기 6월 낮에 태어난 소라고.
그러니까
열심히 땀 흘려 일할 팔자라는 것이다.
그 말에 또 한 번 크게 웃었다.
디스크가 터졌는데도
몸을 비틀고 뛰어야 하는 상황.
(무용을 하는 사람이니까.)
그녀가 터널을 지나가는 방식이다.
그녀는 꿈도 참 스케일이 크다.
바다에서 불이 덮치기도 하고
용이 오르기도 하고
해일이 밀려오기도 하고
맑은 물이 세상을 뒤덮기도 한다.
그렇게 거대한 꿈속에서도
그녀는 커다란 산을 온몸으로 맞서며
버틴다.
멘탈이 정말 갑 중의 갑이다.
살다 보면
세상에는 참 많은 풍파와 비바람이
우리에게 들이닥친다.
이 농번기 소인 그녀는
오늘도 묵묵히
그 비바람을 지나가며
자기 몫의 일을 해낸다.
나는 그녀에게
존경과 조금의 안쓰러움,
그리고 작은 위안을 건네고 싶다.
며칠 전 그녀가 이모네서 받아 왔다며
사과를 건넸다.
일도 하면서 집도 늘 깔끔하고
아이들의 스케줄도 꼼꼼히 관리하는
진짜 멀티 인간이다.
사과를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싸 온 손길을 보니
그녀의 꼼꼼함과 디테일이
그대로 느껴진다.
나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렇게까지 할 에너지가 없다.
그래서일까.
사과를 바라보다가
문득 그녀가 생각났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농번기 소처럼
묵묵히 하루를 끌고 가고 있을
그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