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의 매듭
삶에서 내가 지은 선과 악은 어느 한순간 사라지거나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정리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한다. 한 해를 매듭지으며 걸어온 발자국들을 조용히 되짚는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할까. 삶의 궁극은 버리거나 취하는 게 아니라, 생을 다하는 날까지 겸손하게 받아 들고 성찰하는 일이다.
집에서 나와 연신내 지하철역까지 가는 길에 키는 작지만 다부진 체격의 환경미화원을 자주 마주친다. 가끔은 만나지 못할 때도 있지만, 출근 시간이 이른 편이라 웬만하면 만난다. 마라톤 연습할 때도 스치는 인연이다. 안전모 쓰고 마스크 껴서 얼굴을 정확히 알아볼 수 없다. 대부분 남성이 맡아서 하는데, 그분은 여성으로서 묵묵히 청소에 열중이다. 가끔 수고한다는 말을 전할까 말까 망설이기만 할 뿐 한 번도 전하지 못했다.
한 해가 저물기 전에 그의 수고에 따뜻한 말 한마디 꼭 전하고 싶다. 간단한 인사말 하는데도 망설임이 많은 것은, 숫기가 모자란 탓이다. 살가운 인사가 혹 불편하게 느껴지진 않을까. 기어드는 목소리로 제대로 전하지 못하면 겸연쩍음을 먼저 걱정한다. 여태까지 인사를 전하지 못했던 별별 이유다.
나의 달리기는 올 한 해 농사 잘 지었나 되짚어 본다. 손발이 꽁꽁 어는 겨울에도 달렸다. 한여름 불볕더위에도 멈추지 않았다. 가슴을 뿌듯이 채우는 웃음도 있었지만, 가끔은 넘어지는 아픔도 있었다. 마음껏 웃을 수 있어도 자만하지 않았고, 넘어져 고꾸라질 때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달렸다. 비가 내리는 날에도, 달빛 저무는 새벽녘에도 꿈꾸듯 달렸다. 인도에 흩어져 있는 쓰레기를 쓸고 담고 버리며 바쁜 아침을 열었던 환경미화원 아주머니도 나의 무탈한 달리기 열정에 한몫했다.
함께 달렸던 러너가 마라톤 풀코스 500회 완주했을 때는 내 일처럼 기뻤다. 그의 열정이 존경스럽기는 하지만 배우고 싶지는 않다. 솔직히 말하면 그럴 만한 능력이 못 되어 포기하는 마음이 먼저다. 기쁨은 채워지는 만큼 비워야 순리다. 채우는 기쁨도, 비우는 서운함도 아름다움이다. 내 작은 주머니에 남는 여분의 기쁨만으로도 충분하다. 비워낼 서운함도 덩달아 작아질 테니 더 욕심부릴 필요가 없다. 걸음을 멈추는 그 순간까지 훼손하거나, 폄훼하지 말아야 할 가치다.
환경미화원 아주머니의 주머니도 크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많은 돈을 벌거나 명예를 얻는 직업은 아니지만, 일을 대하는 진지함은 그 어떤 재력가나 권력가에 못지않다. 오히려 더 성실하고 검소하리라 생각된다.
해가 저물기 며칠 남겨두고 버스정류장 주변에서 인도와 차도를 오르내리며 쓰레기를 쓸어 담고 있는 환경미화원 아주머니를 만났다. 우리나라 거리는 비교적 깨끗한 편이다. 그런데, 관심 가지고 자세히 보니 별별 쓰레기들이 생각 없이 흩어져 있다. 담배꽁초, 커피 컵, 막걸리 통, 짝 잃은 장갑, 찢어진 신문지 등. 밤마다 이렇게 쓰레기가 쏟아지는데도 깨끗했던 이유는 아주머니의 수고가 있었다.
용기 내어 인사를 건네려고 다가가니 버스에서 승객들이 내려 기회를 놓쳤다. 기다렸다가 승객들이 빠지고 나서 다가가 “아주머니” 불렀다. 들리지 않는지 기척 없이 자기 일에만 열중이다. 다시 목청 돋워 불렀더니 고개를 든다. 넥워머로 얼굴까지 가리고 보안경을 써서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의아한 눈치다. 대뜸 “수고 많으십니다”라고 말했다. 우물쭈물하다가 목소리가 기어들면 괜히 어색해질 것 같아 큰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웃는 표정으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조심하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서서 전철을 타는 출근 시간이 참 행복했다. 청소에 방해되지 않는 범위에서 자주 인사해야겠다는 마음을 다지며 깔끔한 한해 마무리와 함께 묵은 숙제를 끝낸 느낌이어서 좋다. 마라톤 풀코스 힘겹게 달리고 나서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과 같은 기분이다.
선업이든 악업이든 나로서 비롯된 것이라면 내가 갈무리해야 할 나의 몫이다. 못난 몇몇 정치인들처럼 핑계 대거나, 피하지 말고 가슴에 오롯이 품고 삭여내자. 가재눈으로 더 좋은 것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말자. 나에게는 나만의 자리가 있다. 환경미화원 아주머니가 묵묵히 성실하게 일할 수 있는 그 자리가 천하 명당이다. 그가 삶을 대하는 자세를 존중한다. 언제나 안전하게 아름다운 마무리 잘하기를 바란다.
문득 ‘삶은 언제나 소소한 행복이다’ 가슴통에서 묵직하게 울리는 이 말을 붙잡고 악업보다는 선업에 가까이 다가가는 삶이 되기를 다짐하며 갑진년의 문을 닫는다.
[일시] 2024년 12월 22일
[대회] 연습(양재천, 한강 일원)
[기록] 21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