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강물과 평생 어울린 역도원, 마실 물 없어 죽다

(지명 연구자의 인간관계 5-3)

by 오해영

직업생활에 몸 바쳐 일하다


직업은 생존과 자기 계발 그리고 사회발전에 기여를 할 수 있는 삶의 통로이다. 그래서 직업은 생존의 수단이면서 삶의 목적이 되기도 한다. 어디까지가 수단이고 어느 단계까지가 목적일까?


직업생활을 해감에 따라 직업과 관계 맺기 정도가 깊어지고 경험이 쌓이고 경륜 가치관이 생기며 오묘해진다. 그래서 어떤 단계에 이르면 먹고살아야 한다는 직업의 수단은 경시되고 이젠 삶을 직업에 바치는 뒤바뀜 내지 목적의 변화가 생긴다. 그러면서 이제는 직업의 사명 실현을 최상위에 두고 직장의 규정 준수를 매우 중시하게 된다.


특히 전문분야에서 장기간 일하게 되면 그 정도가 더 깊어져서 온갖 정성을 다해 일을 하며 자기희생을 감수까지 하는 경향이 강해진다. 직업생활을 어떻게 해야 직업의 수단과 목적의 조화로움을 이룰 수 있을까? 여기 역도원의 삶과 직업의 노정을 통하여 살펴보자.


물줄기에 대한 종합 지리서를 편찬하다


역도원은 수경주水經注라는 강과 하천에 관한 지리서를 편찬한 지리학자이자 문인이다. 이 책은 전한前漢상흠이 저술한 수경이라는 물길에 관한 책에 내용을 대폭 추가하고 해설한 지리서이다 그래서 주注자를 붙여 수경주라고 한다.


수경은 중국역사상 물길에 관한 첫 전문서적으로 전한 왕조시기 낙양출신의 상흠이 저술한 책으로 137개소 하천의 물길과 지리를 8200 여자에 담았다. 하천의 발원지 물이 흐르는 길 마지막에는 어디로 유입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간단하게 기술되어 있으며 전한과 삼국시대의 나라정세도 살짝 포함되어 있다.


이런 수경에 역도원은 하천의 숫자를 137개소에서 1,252개소로 글자수는 8200글자에서 30만 자에 이르는 자세하고 방대한 종합지리서로 바꿨다. 그 내용을 보면 지질 토양 기후 물산 민속 성읍의 성쇠 역사고적 전설등이다. 고대 중국의 지리서 중 가장 뛰어난다는 평가를 받는다.


역도원은 젊어서는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다니며 물줄기를 답사하였고 본인의 직업생활 중에는 틈틈이 주변지역의 강의 흐름과 주변의 인문 지리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한 결과를 쏟아부은 것이다.


법을 지킨 대가, 권력자 음모에 휘말려 목숨 잃다


역도원은 북위왕조 시기의 인물로 고향은 북경 남쪽과 연접한 탁록이다. 470년 북위의 수도인 대동에서 출생했는데 부친이 대동에서 근무한 관계로 고향이 아닌 외지에서 출생한 것이다. 12세 때 부친이 산동지방에 있는 청주 자사로 임명되자 청주로 이사하였다. 그는 부친을 따라 산동지역의 하천을 두루 돌아보고 연구하였다.


또한 18세 때 부친이 병사하자 3년 상 후 관료로 직업의 길에 들어섰는데 주요 근무지는 산서 하남 하북성 등이었다. 업무 틈틈이 자신의 근무지역의 강을 직접 답사하고 연구하면서 도면도 작성하였다. 도면은 안타깝게 유실되어 현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권신의 무고로 파면되어 약 10년간을 일을 못하게 되자 그간 연구하였던 자료를 기초로 수경에 주석을 달아 수경주를 편찬하였다. 그러다가 524년 복직하여 여러 요직을 맡았으며 황제 명으로 여러 지방을 순찰하기도 하였다.


역도원은 업무를 수행할 때 규정 지키기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는데 특히 법을 어긴 경우는 매우 엄격하게 처리하였다. 예를 들면 어사중위라는 감찰과 법 집행을 담당할 때의 일인데 권력자의 부하가 그의 상관의 힘을 믿고 직원을 선발할 때 권한을 남용하였다. 그러자 역도원은 본인의 업무권을 발동하여 이 권력자의 부하를 잡아가뒀다.


그러자 그 범법자는 자신의 상관을 통하여 태후에게 불법 행위를 용서해 준다는 사면령을 받게 되었다. 이 소식을 사전에 알게 된 역도원은 법을 어김에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는 직업관에 띠라 태후의 사면령이 도착하기 전에 그 범법자를 처형해 버렸다. 이 일로 역도원은 권력자의 미움을 받았으며 후에 복수당한다.


그 당시 북위의 서쪽 영역인 옹주의 자사가 반역을 도모하고 있었다. 이 첩보의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권력자는 역도원을 파견하여 옹주자사의 상태를 살펴보라 하였다. 이런 중차대한 업무 수행에 역도원을 보내는 의도는 복수하려는 목적이었다. 즉 옹주자사의 힘으로 역도원을 살해하는 음모를 꾸몄다. 그는 동생 둘 아들 둘 그리고 소수의 호위병을 거느리고 옹주지역으로 출발하였다.


가는 도중 섬서 성 입구에 있는 동관潼关 음반역阴盘驿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고대 중국의 관리가 지방 행차할 경우 정부가 운영하는 역참에서 숙식을 하게 되어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 역참은 언덕에 위치하여 필요한 물은 언덕 아래에 있는 개천에서 물을 길러야 했다.


권신은 동관 역참에서 묵게 되는 역도원의 행로 정보를 옹주자사에게 누설하였다. 과연 자사의 부하들이 역도원 일행을 역참에서 나오지 못하게 둘러쌌다. 역도원 일행은 며칠은 버티었으나 결국에는 마실물이 없아 죽게 되었다. 527년에 일어난 일로 그의 나이 57세였다.


그는 죽기 직전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평생 물과 함께 살아왔건만, 이렇게 목말라 죽는구나!”


옹주자사의 난 평정후 북위 정부는 그의 죽음 원인을 밝혀내고 고향 탁록에 성대한 장례절차를 거행해 줬다. 그의 직위는 3남이 이어받는다.


수경주와 고대 우리 겨레의 지명


수경주水經注 14권에 요수遼水 패수浿水 등 우리 고대사와 관련된 하천이 기술되어 있다. 이 기술이 중요한 이유는 고조선 고구려의 영역 범위와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강의 위치와 유수 방향이 매우 중요하다


패수에 대해서는 사마천의 조선열전에서는 조선의 서쪽 경계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수경주에서는 강의 발원지와 흐르는 방향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고대사는 요수는 지금의 난하로 고구려의 서쪽 경계 안쪽에 흐르던 강이고 패수는 고조선의 서쪽 경계이었다. 즉 고대국가의 영역이 요령성 지역까지인지 한반도 내로 국한돼야 하는지에 대한 요점을 제공하고 있다.


역도원은 직접 강을 답사하고 도면까지 그렸다 한다. 북위의 영역에 요령성이 포함되니 않음이 일반적인 견해인데 역도원이 답사할 수 없는 나라 밖에 있는 강들을 어떻게 알았으며 왜 기술하였을까?


살면서 인간관계 어떻게 맺아야 하나


역도원은 타고난 재능과 호기심으로 물길 연구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직업상 관계 맺은 동료들과 시심 없이 지내면서 규정을 엄격히 지키며 살았다. 그런 그의 죽음은 그의 잘못이나 과실이 아닌 권력자의 개인적 원한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질문하게 된다. 직업은 과연 삶의 수단일까 목적일까? 직업을 통해 맺게 되는 인간관계는 어떻게 조율해야 할까?


성실하게 일하고 법과 원칙을 지키는 삶이 반드시 무탈하고 억울하지 않은 삶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직업을 어떻게 대하고 직장에서의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할까?

역도원의 삶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keyword
이전 12화글로 큰 업적 남겼으나 쪼잔한 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