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 연구자의 인간관계 5-2)
글쓰기를 하다 보면 마음의 상처나 트라우마를 마주 대하게 되고 마음과 대화를 통하여 치유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진수는 글쓰기 재주가 뛰어나 큰 업적을 남겼으며 후대에까지 대단한 영향을 주고 있는데 정작 자신의 품성이나 인간관계에도 의미 있는 영향을 미쳤을지 그의 삶과 인간관계를 통하여 생각해 보자.
예전이나 지금이나 소설 삼국지의 인기와 영향은 상당하다. 이 소설의 원전은 진수가 쓴 역사 삼국지로 이 사서를 기반으로 우리가 읽고 있는 삼국지가 쓰였다. 또한 역사서인 삼국지에는 우리 겨레의 활동 영역과 한반도에 존재했던 수많은 나라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나라들의 국명이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행정지명의 시작이다.
삼국지는 위ㆍ촉ㆍ오 삼국의 글들을 모아 기전체 형식으로 편찬한 역사서이다, 이 책은 총 65권이며 위서 30권 촉서 15권 오서 20권으로 각각은 본기本紀와 열전列傳으로 구성되어 있다. 위나라를 정통 왕조로 촉나라와 오나라를 지방정권으로 보고 역사를 서술한 것이다.
이 중에서 우리 겨레와 관계가 있는 부분은 위서의 마지막 권인 제30권 오환선비동이전乌丸鲜卑东夷传인데 통상 동이전이라 한다. 동이전은 서문이 있고 다음으로 부여ㆍ고구려ㆍ동옥저ㆍ읍루ㆍ예ㆍ한韓ㆍ왜로 구성되어 있다.
이전 중국 역사서에 한반도를 언급한 경우가 있으나 관점은 중국과의 교섭이 주요 내용이었다. 그러나 동이전은 중국과의 교류뿐만 아니라 동이족 사회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위치·강역·인구·정치체제·사회조직·의식주ㆍ풍속·신앙등이다.
이 중에서 한韓에 관한 내용은 마한·진한·변한 등 삼한에 관한 기록인데 그 내용을 보면 한韓은 대방의 남쪽에 있으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한계로 삼고 남쪽은 왜와 접하며 사방 4 천리쯤 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 마한에 목지국·백제국·내비리국 등 50여 개의 나라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으며 큰 나라는 호구수가 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호로 총 10여만 호 정도이다고 표현돼 있다. 왜 이렇게 지세하게 기록하였는지 모르겠으나 우리 겨레를 위나라에 딸린 존재로 여기고 있다. 일종의 중화사상에 의한 편제라고 볼 수 있겠다.
진수는 233년 익주(현 사천성) 파서군 안한현에서 태어나 297년 병으로 죽었다. 형년 64세로 약 1800여 년 전에 살았던 점을 감안하면 장수한 편이다라고 하겠다. 촉나라에서 태어나 진나라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부친은 촉나라 관리로 제갈량이 위나라를 정벌하고자 하는 제1차 싸움에서 마속의 부대에 배속되어 참전하였다. 그러나 마속의 어이없는 실수?로 전쟁은 패배한다. 마속은 처형되고 진수의 부친은 머리가 깎이는 곤형(그 당시 중벌에 해당)을 당했다. 이 사건은 진수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다. 일종의 트라우마를 겪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성장기에 좋은 스승을 만나 제대로 공부하였다. 배움을 마친 후 촉나라에서 관료로 세상에 나아갔는데 기록과 문서를 관장하는 주부主薄 동관비서랑东观秘书郎 관각영사觀閣令史를 역임하였는데 그의 글재주와 연관이 큰 업무라고 볼 수 있다.
촉나라가 서진에 의해 망하자 서진 왕조로 들어가 역사나 서적을 편찬하는 저작랑著作郎 지역의 책임자인 장광태수长广太守 도서와 책을 관리하는 치수시어사治书待御史를 맡았다. 마지막에는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로 기용되었다. 자신의 특기를 펼칠 수 있는 업무를 주로 맡았다. 조카들도 서진에서 관리를 하였다 한다.
촉나라에서 함께 벼슬을 하였던 이양과 사소한 일로 사이가 틀어져 서로 악담 욕설을 주고받는 원수사이가 되고 말았다. 심지어 진수가 진왕조에서 관직에 오른 뒤에 이양도 진의 벼슬길에 나아가려고 했지만 방해하여 이양은 취직을 단념하고 고향인 촉지방으로 돌아가 살았으며 평생 벼슬하지 못하고 죽었다.
모친이 별세하자 시신을 낙양에 묻으라는 유언을 따랐으나 고향에 묻어야 한다는 그 당시의 예를 어긴 이유로 지역사회의 비난을 받았다. 또 아버지 상중에 병이 나서 환약을 만들게 했는데 이 소식이 알려져 주변 사람들에게 불효자라 욕을 먹었다. 당시 부모 상중에 병이 나거나 건강이 나빠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또 역사가로서 책을 기술함에 공정은 당연한 자세이나 진수가 남긴 일부 작품은 사사로운 감정을 개입시켰다는 의혹도 받았다. 그 예로 촉에 있을 때 받은 사적인 원한 때문인지 제갈량에 대한 행적을 부정적인 관점에서 썼다 한다.
진수는 촉나라에서 벼슬을 할 때 그 당시 권력자인 환관 황호에게 싫은 소리를 하여 핍박받았으며 벼슬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조국을 멸망시킨 진나라에서 여러 벼슬을 하였으며 진나라의 황제도 진수의 재능을 인정하고 관직을 높여 주기까지 하였다.
그의 스승인 초주는 촉나라의 역사학자 천문학자로 진수에게 학문으로 이름을 떨칠 것이니 도중에 실패를 겪어도 불행이 아니므로 언행에 신중히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한다. 그럼에도 진수는 사사로운 관점으로 인간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역사가는 인간관계의 정수를 파악하는 직업인데 촉나라에 있을 때는 권력자의 미움을 받고 진나라에서도 불효자나 예의를 어긴다는 욕을 먹었다. 조국에서 함께 일했던 친구를 끝까지 미워하고 그의 장래를 훼방까지 하였다. 언행을 조심하라는 스승의 지적이 있었는데...
더 출세하고 더 가지고 싶은 욕망이 그간 익힌 경륜과 경험을 압도하였을까? 아니면 타고난 성품에 따른 행동으로 손해 이익을 고려할 수 없는 모난 돌이었을까? 글쓰기의 마음 치유 효과는 있었을까 없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