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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부주의로 초래된 반고의 죽음

(지명 연구자의 인간관계 5-1)

by 오해영

작은 부주의가 치명적 결과를 초래한다는 말이 있는데 반고의 삶이 그러하다. 반고는 약 이천 년 전에 살았던 중국의 역사가이며 역사서에 지리지를 포함하여 편찬하였다.


그의 이름은 낯설 수 있어도 우리나라의 삼국사기와 지리지 서술 형식은 그가 고안한 방식이며 중국의 옛 지명에서 상당한 부분이 그가 정리한 책에서 비롯되었다.


이렇게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의 마지막 삶은 너무나 어이가 없다. 평생을 학문에 뜻을 두고 살았으며 삶의 과정에서 나무랄 데 없는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았는데 매를 맞아 목숨을 잃었다. 술 취한 하인의 실수와 그 실수를 마음에 담아둔 속 좁은 관리의 복수로 삶의 마지막을 믿기 어렵게 보냈다.


지명과 역사를 연계하다


역사를 인물중심으로 설명하는 방식인 기전체를 처음 고안한 사람은 사마천이었으며 그가 쓴 역사서가 사기이다. 반고는 그보다 80여 년 뒤 인물로 같은 방식을 사용하여 한서를 편찬했다.


사마천의 사기는 중국의 시작부터 사마천이 살고 있을 당대까지 약 3천 년의 역사를 정리한 것이고 반고의 한서는 한漢나라의 시작부터 망할 때까지의 약 이백 년의 역사이다.


사기에는 지리지를 별도로 구성하지 않았으나 한서에는 지리지를 역사서의 한 부분으로 보아 한서지리지를 만들었다. 한서는 총 100권으로 구성(제기帝紀12권, 표表8권, 지志10권, 열전列傳 70권)되어 있다.


이 중에서 지志에 한서 지리지가 있는데 각 지역의 인구 산천 강물 풍속 특산물 등에 관한 정보를 정리했다. 일종의 자연과 인문 지리백과라고 할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는 4500개 지명이 기재되었다.


우리나라 옛 지명을 언급한 반고


한서는 우리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고조선이 멸망하고 그 자리에 한사군이 설치된 역사가 있는데 사마천의 사기에는 4군을 두었다고만 기록하였는데 반고는 한서 무제본기에 4군의 지명을 낙랑군 현도군 임둔군 진번군이라고 기록했다.


지금도 이 지명이 어디였는지를 두고 학계에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고조선이 망할 당시에 살았던 사마천은 전쟁보고서를 직접 보고 기록한 것이며 한사군의 실제 지명을 기록한 반고는 80여 년이 지난 후 역사를 편찬하였다. 이점에 큰 시사점이 있다 하겠다.


또한 한서지리지에 우리 역사와 관련된 지명이 있는데 요서군 요동군 현도군 고구려현 조선현 대방현 패수현 등이다. 여기에서 고구려현을 현도군과 연결하고 있으며 낙랑군 하부에 조선현 대방현 패수현을 기술하고 있다.


성실한 삶을 살아가는 평생의 노력과 어이없는 말년


반고는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가족구성원 모두 대단한 업적을 남겼다. 아버지는 역사서를 쓰던 인물이고 여동생은 뛰어난 지식인 여성이었는데 반고가 완결하지 못한 한서를 마무리하였다. 남동생은 전한 시기 잃었던 서역을 담대한 책략과 외교로 다시 찾아온 군인이자 외교관이었다.


그는 16살에 당시 국가 최고 교육기관인 태학에 들어가 공부했고 23살에 아버지가 죽자 귀향하여 부친의 유지를 이어 역사서를 쓰는데 열중하였다.


하지만 그의 학문적 과정은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가 혼자서 몰래 역사를 쓴다며 모함하여 감옥에 갇히기까지 한다. 그 당시에 개인이 역사서를 저술할 수 없었다. 다행히 황제가 그의 재능을 알아봤고 정식으로 국가 도서관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또한 황제의 명령으로 전한 왕조의 역사서를 국가사업으로 쓰기 시작했다.


60살이 되었을 때 흉노와의 전쟁에 참여하였는데 직책은 군사를 감독하는 호군이었다. 군사기밀과 전투에 관한 보고서 작성에도 참여하여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 책임자인 장군이 반역 혐의에 몰려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반고 역시 장군과 좋은 관계이므로 같은 패거리일 것이다는 모함을 받아 파면되었다.


그러나 그의 가혹한 운명은 이제 시작이었다. 예전부터 원한을 품고 있던 낙양성 책임자의 복수망에 걸려들어 감옥에 갇히고 모진 매질을 당하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원인은 사소했다.


반고 집안 하인이 술에 취하여 좁을 길을 가고 있던 낙양책임자가 탄 마차를 향해 욕을 하였는데 그 관리는 반고가 정권의 실세와 친하다는 현실을 감안하여 하인을 나무라지 않고 가슴에 묻어두었다. 그 후 몇 년이 지난 뒤 반고가 파면되자 그를 잡아 감옥에 가두고 고문을 하였던 것이다.


살아가면서 인간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할까?


반고는 태학에서 공부를 할 때 교만하지 않으며 온화하고 포용성 있어 학우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러한 인성과 많이 배운 지식으로 후한 황제의 총애를 받아 승승장구했고 황제와 동행하여 여행을 하기도 하였다.


좋은 인성과 뛰어난 재능으로 좋은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온 삶이 어느 한순간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그것도 집안 하인의 실수이었으며 만일 반고에게 책임이 있다면 그 하인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점일 것이다. 어이없는 일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그는 평소 사마천이 왜 궁형을 피하지 못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역시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다.


우리가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주변 사람과 조화로운 인간관계를 유지하려 많은 노력을 한다. 그런데 주변의 어디까지 온전한 신경을 써야 할까?


지명을 공부하는 일은 단순히 옛날 장소 이름을 아는 것이 아니며 그 속에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 관계가 담겨 있다. 반고의 업적과 삶의 여정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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