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 연구자의 인간관계 5-4)
한평생에 타고난 재능을 닦고 올바른 언행으로 덕을 쌓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삶이라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삶은 그리 교과서적이지 않은 것 같다.
고대 왕조 시대에 한 국가의 지명을 연구한다는 것은 방대한 지리 지식과 깊이 있는 역사·문화의 이해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선천적인 재능뿐 아니라 끈질긴 학문적 열정 그리고 자료 수집과 해석을 돕는 주변 사람들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또한 지명 연구는 단지 학문적 성취에 그치지 않고 실제 행정 실무에 응용되어야 한다. 때문에 동료들과의 원만한 관계 유지도 연구자의 중요한 자질 중 하나이다. 이처럼 재능 노력 품성을 고루 갖추어야 진정한 지명 연구자라 할 수 있다.
중국은 아주 오래전부터 지리와 지명 업무를 정부에서 관장하여 왔다. 주나라 초기부터 이런 직책이 있었다는 기록을 볼 때 이 분야에 종사한 한 사람은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이들 중에서 몇 명만이 후대에게 작품과 이름을 남기고 있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중 일부만 뛰어났을 경우 예컨대 재능은 탁월하지만 인품이 부족한 사람은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 우리는 범엽范曄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 물음에 다가가 보자.
중국 후한은 서기 25년부터 220년까지 약 200년간 존속한 왕조다. 여러 명의 학자들이 이 시기를 다룬 역사서를 썼지만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작품은 바로 범엽의 후한서다. 기록에 따르면 그 이전에 이미 7종의 후한서가 있었지만 범엽의 작품만이 후세의 인정을 받아 중국 정사正史의 하나로 대우받았다.
범엽은 432년 34세의 나이에 중앙의 근무지에서 안휘성 선성宣城 태수로 좌천되었다. 이때가 바로 후한서 집필에 몰두한 시기였다. 그는 앞선 역사서를 꼼꼼히 비교·분석하고 부족한 사료를 수집하여 새로운 문체로 편찬에 나섰다. 그 결과 이전 작품들보다 훨씬 충실하고 뛰어난 역사서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범엽은 이 작업을 완성하지 못했다. 445년 모반 음모에 연루되어 47세의 나이로 처형당했기 때문이다. 이후 후대 학자들이 지리지를 보완해 본기 10권·열전 80권·지30권 등 총 120권으로 편제되었다.
범엽은 398년 하남성 순양에서 태어났다. 동진 말기의 혼란한 시기에 유년기를 보냈으나 학문에 조예가 깊고 문장이 뛰어난났다. 유학 경전과 역사서에 정통했을 뿐 아니라 예서와 음률에도 능했던 만능형 지식인이었다.
그는 19세에 지역의 자사가 문서를 관장하는 주부主簿로 등용하려 했으나 거절하고, 유유劉裕의 아들 유의강劉義康의 군에 참여하면서 직업의 세계로 들어섰다. 유유가 동진을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세우자 범엽은 승진을 거듭해 태자의 서무를 관장하는 태자첨사太子詹事와 금위군 장군 등 주요 직책을 역임했다.
하지만 유유 사후 황위는 유의강이 아닌 다른 아들이 이어받았다. 이후 범엽은 황위를 빼앗아 유의강을 옹립하려는 음모를 추진한다. 이 계획에 참여했던 서담지徐湛之가 배신 고발하여 445년 47세에 처형당하는데 그의 아들 셋도 함께 죽었다.
범엽의 재능은 분명 탁월했다. 그러나 그의 행실은 동시대의 시선에서도 문제였다. 예를 들어 범엽의 상관인 유의강의 모친이 세상을 떠났을 때 금욕했어야 하나 술 오락 음악을 멈추지 않았다. 송 문제는 이를 문제 삼아 그를 지방으로 내쫓기도 하였다.
또한 자신의 적모-아버지의 본부인-가 사망했을 때에도 장례에 참석하지 않고 행실이 좋지 않은 여인들과 함께 어울려 지탄을 받았다. 이러한 몰염치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그의 문장력을 높이 평가해 용서했다.
범엽은 황족과 혼인하려는 야망을 품기도 했다. 그러나 송 문제가 이를 거절하자 그는 불만을 품고 유의강을 옹립하려는 모반을 추진한다. 형장에서도 가족의 안위보다 자신의 지위에 집착했다고 한다.
부인이 “당신은 황제의 은혜를 저버리고 자식들까지 죽게 했다”라고 질책하자 그는 냉담하게 대답한다.
“이제 그런 말은 다 소용없소."
그의 집이 수색되자 값비싼 악기와 화려하게 차려입은 무희들이 발견되었지만 정작 모친은 부엌 옆의 작은 방에서 근근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의 삶과 태도는 사치와 파렴치 그리고 가족에 대한 무책임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범엽의 후한서 동이전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여기에는 부여·읍루·고구려·동옥저·예·삼한·왜 등의 기록이 상세히 담겨 있다. 이전 진수의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과 내용이 유사하지만 범엽은 훨씬 더 자세하게 동이 지역을 기록했다.
특히 삼한에 대해 마한 54국 진한 12국 변한 12국 등 총 78개 국가 이름을 기록해 놓은 것은 지명 연구자에게 매우 귀중한 사료이다. 진수가 몽골 만주 한반도를 하나의 게통으로 묶어 오환선비동이전이라 했으나 범엽은 만주일부와 한반도만으로 동이전을 편제하였다.
이 때문에 삼국지 동이전을 기피하고 후한서 동이전을 중시하는 경향이 짙어졌고 남송이래 삼국의 정통 왕조를 조조에서 유비로 바꾸려는 역사인식에 편승하여 이런 경향을 더욱 공고해지고 나아가 역사 인식 자체에 변화를 일으켰다.
우리의 경우도 후한서의 동이전을 더 중요하게 여겨 5세기 고구려의 영역은 고조선 낙랑·요동군 등의 중국 군현 그리고 부여·읍루·동옥저·예를 포용하고 있던 까닭에 고조선의 땅과 삼한을 별도의 지리로 취급하는 역사인식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범엽은 분명 뛰어난 역사서를 남겼다. 그러나 그의 삶은 결코 가치 있다고 여길 수 없다. 그는 권력을 탐하고 주변을 배려하지 않으며 결국 가족까지 불행에 빠뜨렸다. 재능은 넘쳤지만 인품은 따라주지 못하여 평가는 낮을 수밖에 없다.
지명 연구자에게 필요한 조건은 단지 지식이나 글재주만이 아니다. 연구자는 절제된 행실과 타인과의 조화를 이뤄야만 지식의 쓰임을 더 넓히고 본받을 만한 삶이었다고 기억될 것이다. 범엽의 삶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재능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아니면 사람으로서도 존경받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