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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재능이나 지명에 올인, 가탐

(지명 연구자의 인간관계 5-5)

by 오해영

극히 평범한데 열정을 쏟는다고 뭘 이룰 수 있을까


안정적인 직장 평범한 재능 무난한 퇴직 그리고 낮은 사회적 주목도, 많은 직장인의 삶은 이런 사이클 안에서 시작하고 마무리한다. 특별한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혹은 시대가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핑계로 우리는 스스로를 애써 납득 위안하며 살아간다.


그러다 문득 이름을 남긴 이들의 삶을 바라보며 말한다. "그들은 원래 뛰어난 재주를 가졌고 시대의 뒷받침과 운도 따랐기에 가능했지."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이 질문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인물이 있다. 당나라의 가탐 평범한 하급 관료로 출발했으나 자신의 관심사 하나에 평생을 바쳤다. 그는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조용히 지도의 선을 긋고 지명의 역사를 적어 내려갔다.


가탐, 지명의 언어로 세계를 그리다


가탐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지도 제작을 이뤄낸 인물이다. 그가 만든 해내 화이도海內華夷圖는 당나라 중심의 세계지도로 당시로선 파격적인 시도였다. 길이 10미터 너비 10m의 거대한 지도 위에 산천 도로 행정구역 주변국의 경계를 그려냈다. 축척을 사용하여 일정한 간격으로 구획하는 방격도方格圖를 사용했다.


또한 그는 고지명과 현재 지명을 각각 흑색과 붉은색으로 구분하여 표기했다. 이는 단순한 정보의 나열이 아닌 지명의 시간성과 역사성에 대한 혜안이었다. 지명은 고정된 이름이 아니라 시대와 권력에 따라 바뀌는 살아있는 언어라는 것을 이미 1,300여 년 전에 꿰뚫어 봤던 것이다.


지명은 정치적 의미를 담은 권력이다


그의 업적 중 관중농우급산남구주등도라는 중국서쪽지역에 대한 지도가 있는데 주목할 만한 내용이 등장한다. 이 지도는 토번(티베트계 국가)에게 빼앗긴 당의 옛 영토를 그린 지도로 정치불안 많은 세금으로 백성의 생활 곤란 국력 쇠약으로 지켜낼 힘을 잃어버린 중국의 현실에 대해 기술한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발을 디딜 수 없는 땅 잊혀가는 이름 사라진 경계를 지도에 그리고 의미를 되살렸다.


이는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지도제작을 통한 상징적인 영토회복 선언이었다. 지명은 곧 통치의 기억이며 지도는 그 기억을 현실에 되살려 눈으로 볼 수 있게 나타낸 부호이었다. 이는 당나라의 영토적 자존감을 지키려는 애국심이기도 했다.


가탐의 가장 대표적인 저술은 고금군현도사이술로 그의 나이 72세에 완성한 대작으로 40권에 달하는 방대한 지리지이다. 30년에 걸쳐 수집한 내용을 종합한 이 책은 중국 본토뿐 아니라 주변 민족의 지리 역사 문화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특히 지명은 단순한 위치 정보가 아니라 이름의 시간성으로 민족의 흥망과 문명의 교차를 보여주는 서사로 다뤄진다. 예컨대 한반도 관련 기록에서 신라는 장안에서 5천 리 떨어져 있다고 했고 발해 사신은 수로를 이용하여 당나라에 왔다고 적었다. 이는 지명이 단순히 어디에 있는지를 넘어서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가 왜 그렇게 연결되었는지를 말해준다.


우리는 왜 지금 가탐을 다시 봐야 하는가


가탐은 화려한 정치 커리어를 남기진 않았다. 그는 사신 접대를 담당하는 비교적 평범한 외교 관리였고 한때는 지방 관서에서 법률을 집행하는 관직에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사회 발전을 위해 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아 묵묵히 연구하였다.


사신이 외국에서 들어오면 꼭 지리 정보를 물었고 당나라 관리가 외국을 다녀오면 찾아가서 지리 관련 정보를 얻었다.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된 이야기들이 지도가 되고 책이 되었다.


그는 장안의 집에서 숨을 거두는 행운도 가졌으며 정치의 중심에 있지 않아도 역사와 국가의 틀을 구성하는 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지명 연구자의 눈으로 세상을 다시 그리다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름을 잃어가고 있을까? 사라지는 마을 바뀌는 거리 개발과 발전 속에 묻히는 장소. 지명은 공간의 정체성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억과 역사의 뿌리를 연결하는 언어다.


가탐의 삶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무엇에 얼마나 오래 마음을 주는가?" 그가 남긴 지도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말한다.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가장 큰 영역을 그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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