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 연구자의 인간관계 5-7)
자신만의 전문지식으로 국가사회의 안정과 발전에 기여하고 그 공로로 출세함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직장인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그림일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이런 행운을 만나며 이런 행운을 누린 직업생활은 어떠했을까? 그런 직업인에 대한 평가는 어떠할까?
중국 당나라 시기의 이길보李吉甫 758~814는 이러한 직업의 혜택을 누린 지리학자이자 관료였다. 그의 인생 경로를 따라가 보자.
이길보는 젊은 시절부터 지리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직업생활 과정에서 국가 사회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지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곤 했다. 심지어 모함받아 좌천되어 먼 지방으로 또는 여러 지역으로 가서 근무할 때도 멈추지 않았다. 붕당 혐의 모함을 받아 792년 38세 때부터 약 13년의 세월을 여러 지방을 전전하였다.
이렇게 장기간을 지방의 현장에서 근무하면서 그 당시 혼란했던 나라의 속살을 제대로 살펴봤다. 그 시기지방의 군사 책임자인 절도사는 행정권과 인사권을 오로지하면사 중앙조정과 대립으로 사회 불안을 야기하고 있었다. 실무자로서 지방근무를 하면서 이러한 막강한 절도사의 권력을 어떻게 약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을 고민해 보았던 것이다.
이 경험과 관심은 훗날 원화군현도의 편찬 관점을 정할 수 있게 하였다. 즉 중앙조정의 황제입장에서 지방 절도사를 컨트롤할 수 있는 실증적인 아이디어를 찾을 수 있게 지리지를 편찬한 것이다.
예를 들면 806년 사천 지역의 절도사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중앙조정의 대응방안은 분분하였다. 많은 관리들이 사천지역의 지리특징이 수비는 쉬우나 공격이 매우 어려움으로 무력 진압에 난색을 표현하였다. 실제로 출정한 황제의 군대가 이를 공략하지 못하고 있었다.
애초부터 무력정벌을 주장하였던 이길보는 과거 사천지역의 반란에 대한 중앙조정의 조치를 지리적인 관점에서 검토하여 대책을 제안하였다. 즉 육로가 아닌 강을 이용한 공격 의견을 제출하여 사천지역 절도사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게 하였다.
이는 사천지역의 산의 형세와 강의 흐름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면서 자연지리와 역사지리를 알아야만 가능했던 방법이었다. 지역의 지리를 세심하게 파악하여 필요한 전략을 실전에 적용한 것이다.
이길보는 원화군현도지元和郡縣圖志라는 지방 지리지 40권을 편찬하였다. 편찬시기는 806~820년이다. 이 책은 당나라 후반기의 전국의 행정구역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지리지로 이전의 지리지가 단편적 기술에 그쳤던 것과 달리 실증적인 지역 정보를 포괄적이고 체계적으로 기술했다.
구체적으로는 각 군현의 설치 연혁 인구 지형(산천의 위험과 쉬움) 물산 세금 조세 항목(전세 공물 잡세 등)등이었다. 이 책을 편찬 목적은 단순한 학술 작업이 아니라 당 제국의 지방통치를 위한 실용적 자료 제공에 있었다.
당 왕조는 안사의 난 755~763 이후 지방 절도사-군대를 통솔하는 지방의 무관-들이 사실상 반독립 하여 지방의 왕으로 행세를 하였으나 중앙조정은 무력과 경제력이 약하여 이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원화군현도지는 힘과 권위를 잃은 중앙조정이 지방 세력을 통제하기 위한 지리정보 기반 행정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절도사의 난립으로 인해 지방군현이 중앙과 관계가 약해져 가는 현실을 타개하여 중앙조정과 지방의 연결을 어느 정도 회복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를 통해 당 조정은 지방 절도사들의 반란 의도를 사전에 깨트릴 뿐만 아니라 지방 군현에 대한 행정적 통제 권한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으니 이길보의 지리 편찬 사업은 국가 운영 전략의 핵심자료를 제공한 셈이다.
특히 해당 정보를 지도와 함께 제시하여 시각적 이해를 쉽게 할 수 있게 하였다. 이후 지방지리지의 모델로 자리 잡았으며 현존하는 가장 완비된 전국 지방 지리지로 평가된다.
이길보는 명문가 출신 덕분에 과거가 아닌 음서로 관직에 나아갔다. 중앙과 지방을 오가며 관직을 두루 거쳤고 두 차례나 재상을 지냈다. 특히 명주지방-현재 절강성 은주-으로 좌천되었을 때에 과거 재상이었던 자가 자신의 부하로 배치되었다. 조정에서는 이 재상 출신 부하를 괴롭히라는 압력을 넣었으나 불응하고 직무에만 충실했다.
이길보는 절도사 문제 해결에 있어 무력 정벌을 통한 통제 회복을 주장했으며 이에 반대하는 조정 내 세력과의 갈등은 당 후기 정치 투쟁의 갈등으로 비화되었다. 절도사와의 타협을 주장하는 세력과의 대립은 붕당으로 번졌고 이로 인해 당 왕조의 정치적 분열이 심화되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가 남긴 지리 정보와 정책 기조는 이후 송대와 명대에도 계승되었고 행정지리학적 자료로서의 가치는 높게 평가받고 있다.
이길보의 사례는 지리지 제작이 단순한 공간 정보의 기록을 넘어서 국가 경영과 사회 안정에 밀접하게 연결됨을 보여준다. 오늘날에도 공간 정보와 지역 이해는 행정 경제 안보 환경 등 다방면의 정책 결정에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