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연구자의 인간관계 5-9)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미래의 무엇을 기대하며 노력해야 할까? 어떤 이는 자신의 발전된 모습을 보기 위해 오늘의 어려움을 견디고 편안함을 멀리한다. 어떤 이는 훗 세대가 더 개선될 공동체에서 살아가기를 기대하여 현재 해야 할 부분을 찾아 메꾼다.
후자의 경우 나보다는 우리 더 나아가 후손을 위해 본인의 삶을 꾸려간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미래 세대가 현세대에게 무엇을 하였는지 되물을 때 부끄럽지 않을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후대에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한 정구의 읍지 편찬 이야기를 알아보자.
정구鄭逑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읍지인 경남 함안의 함주지咸州志를 편찬한 인물이다. 그는 또한 여러 지역의 관직을 거치면서 읍지를 편찬하거나 관여하였다.
그의 읍지편찬 목적은 고을에 문헌이 부족하고 풍속이 속되므로 이를 개선하고자 함이며 후대가 오늘 살아간 삶을 물음에 말할 것이 없어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다 하였다.
정구가 편찬한 읍지는 옛 역사서뿐 아니라 직접 발로 뛰며 조사한 지역 실태까지 살폈는데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살아 있는 기록을 만들었다. 단순 기록을 넘어 고을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문화를 보존하려는 의도도 있었으며 새로운 지방관이 부임 지역의 쉽게 현황을 파악하고 바로 선정을 펼칠 수 있도록 하였다
조선시대 지방 행정체제는 도道 아래에 부목군현을 두었는데 이 부목구현府牧郡縣을 통틀어서 읍이라고 불렀고 고을과 같은 의미이다. 조선왕조의 군현 완성시기는 1406 태종 6년으로 전국 군현을 개명하고 등급을 결정하여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한 세기 이상의 시간이 흐르면서 군현 나름대로 역사와 전통이 축척되어 이를 기록할 필요성이 제기되어 읍지 편찬이 시작되었다. 16세기 중엽 이후의 일이다.
조선시대의 지리지는 두 종류로 나눠볼 수 있는데 전국을 대상으로 여지와 지방 행정구역을 대상으로 하는 읍지이다. 읍지는 보통 지방행정 중심인 군현 중심으로 사림이 주도적으로 편찬하였다.
이때 읍지 작성 목적은 백성의 다스림을 법에 의한 강제보다 유교에 바탕을 둔 인의 도덕에 의한 교화를 중시한 생각에서 비롯된다. 더 나아가 자기 고장의 문화를 정리하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조선 전기 전국지리지 편찬 바탕과 16세기 읍지 편찬 시작은 18세기 중엽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읍지는 한마디로 한 지역의 역사 자연환경 사람들의 생활상 등에 관한 자료를 담아낸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다. 기록한 항목은 40여 가지이며 중요항목은 서울과 거리 주변과 경계 동네인구 농지 관리배출 유배 선행 마을 간 거리 신분 풍속 등이었다.
정구는 1543년 성주에서 태어나 1620년까지 살았던 성리학자이자 지리지 연구자이었다. 이황 조식 성운 등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38세 창녕 현감을 시작으로 여러 지방에서 관리를 하였는데 부임지마다 읍지를 편찬하였다. 그는 지리지의 편찬을 고을 수령의 업무로 인식하였다.
함주지 이외에 편찬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읍지는 창산지 동복지 통천지 임잉지 관동지 충원지 복주지이고 편찬 사업에 관여한 읍지는 영희지 춘주지 평양지 청주지 등이다. 부임지역의 8종의 지리지와 주희朱熹의 연고지와 자신의 거주지를 소개한 3종의 지리지 등 총 11종이다.
편찬 과정을 통해 지방관이 부임지의 현황을 손쉽게 파악하여 효과적인 임무를 펼칠 수 있는 기본 자료를 제공하였다. 또한 지방 사회에 유교식 예의와 제도를 보급하고 충효를 권장하며 지방 사회의 안정을 바라는 의도도 있었다.
정구는 후대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 오늘을 기록한다고 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이 말 앞에서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 훗 세대는 어떻게 기억할까? 정구는 하나의 답이 되어준다. 읍지는 단순한 지역 기록이 아니라 후대를 위한 문화유산이자 정신유산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