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 연구자의 인간관계 5-10)
이중환은 신분의 귀천과 직업의 선택이 크게 연관되는 조선 시대에 전통 있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충분한 교육을 받고 생계에 큰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가졌다. 그러나 젊은 시절 출세의 길을 밟아 잘 나가던 인생이 어느 날 정치적 이유로 그만 관직에서 쫓겨나고 그 뒤로는 신분사회 속에서 오랜 기간을 직업을 가질 수 없어 전국을 떠돌며 살았다. 그는 어떻게 살았을까?
신분과 직업 선택의 관련이 적은 오늘날 퇴직자의 삶은 어떠한가? 오랜 시간을 일하고 퇴직하였으나 너무 많은 시간이 남겨 있고 그간의 경험과 경륜은 사용치가 낮으며 세상의 변화는 너무 빨라 따라가기는커녕 뒤쳐지며 시간을 보낸다. 그래서 다시 일하고 싶어도 기회는 거의 없다.
그렇다면 남은 삶은 어떻게 꾸려가야 할까?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시간을 보내도 괜찮은 걸까? 아니면 공동체구성원의 역할을 찾아 무언가를 더 해봐야 할까? 이 질문에 우리는 조선시대 인문지리서 택리지를 남긴 이중환의 삶을 통해 힌트를 찾아보자. 과연 그는 퇴직 후 세월을 어떻게 보냈을까?
이 책은 이중환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직접 보거나 혹은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1751년경 쓴 지리지이다. 그는 단순히 땅의 좋고 나쁨을 따진 것이 아니라 지리地理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 이 네 가지 기준으로 사람이 살기 좋은 곳 즉 이중환 자신이 살 수 있는 곳을 고민했다.
택리지는 단지 지역의 자연지리 인문지리의 정보를 모은 책이 아니라 어떠한 조건의 지리를 갖춘 곳에서 살아야 삶의 가치를 더 높일 수 있는지를 고민한 지리 탐구서이다.
이중환은 공주의 갑천 유성 전주의 율담 청주의 작천 선산의 감천 구례의 구만 등을 살만한 곳으로 꼽았다. 그가 추천한 지역은 단지 자연환경만 좋은 것이 아니라 사람 사는 분위기 문화 물산 생산 역사 풍속을 다각적으로 고려하였다.
무엇보다 택리지는 국토를 행정구역이 아니라 생활권으로 구분했다. 산과 하천의 자연 경계를 기준으로 지역을 나누고 사람들의 삶과 문화 이동 생산의 흐름을 연계하여 바라보고 이해하며 설명하려 했다. 이는 지리서로서 매우 획기적인 접근이었다. 지리를 역사적 철학적 사회적 맥락 속에서 풀어 조선 후기 최고의 인문지리지로 평가받다.
이중환은 1690년 공주에서 태어나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후 국가행정기관의 주요 보직을 역임했다. 하지만 1720년대 정쟁에 휘말려 여러 차례 형벌과 귀양에 처해진다. 심지어 짧은 기간에 수차례의 투옥과 형벌을 받기도 했으며 유배지가 한반도 남쪽 끝인 경상도에서 북쪽 끝인 함경도로 정해지기도 했다. 그는 오랜 세월의 유배 생활과 떠돌이 생활을 했으나 다시는 조정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정치 싸움에 희생으로 30년 가까이 떠돌아다니면서 자신이 쉴만한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대부가 살만한 터전을 찾아 전국을 떠돌았다. 이 방랑의 여정 속에서 직접 보고 기록한 자료들이 택리지 저술의 토대가 되었다.
그가 살던 시기의 정치 현실은 냉혹했다. 거듭되는 사화로 선량하지 않은 자들이 형벌을 빌미로 원수를 갚고 정쟁 속에서 반대자는 무참히 제거되었다. 그래서 관직에 있든 은둔하든 늘 위협과 불안 속에 살아야만 했다.
이중환은 이런 현실을 직시하며 자신과 같은 사대부가 살만한 곳을 찾아봤으나 찾기 어렵다고 한탄했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 쉴 곳을 찾고 살만한 삶의 터전 찾기를 고민했다고 볼 수 있다.
택리지는 이중환이 남긴 저술이면서 그의 삶 자체다. 10년 직업생활 30년 방랑생활. 그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도 멈추지 않고 글을 쓰고 조사하고 삶을 고민했다. 결국 그는 우리나라의 인문지리학의 선구자이자 조선 후기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그의 책은 중국과 일본에 까지 전해졌다.
이중환의 삶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삶을 설계하고 있는가?” “어디에 어떻게 누구와 살아갈 것인가?” 퇴직 후 시간이 많아진 우리의 현실에 이 질문은 더욱 절실하다.
삶의 후반을 엮어가는 일은 단지 일자리를 찾는 문제가 아니다. 삶을 다시 생각해 보고 공동체 일원으로 역할을 재정립하는 일 그리고 사회와 관계 맺기를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사회 누군가에 게 환원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볼 일이다.
이중환은 택리지로 오늘의 우리에게 삶의 방향성을 남겼다. 자신의 불행한 삶을 낙담으로 끝내지 않고 살만한 삶을 고민하고 기록하라고.
⁍⁍ 50편의 한중 지명에 얽힌 역사문화에 지혜에 관심과 배려를 주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곧 한중의 산하와 지명이 그린 무늬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