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지명 타임캡슐을 만들다, 김부식

(지명연구자의 인간관계 5-8)

by 오해영

첫 지리지를 쓰다


지명에는 그 지역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람들의 소망이 응축 융합되어 있다. 왕조시대의 경우 중앙집권제 강화를 위한 지방 지리 자료 확보와 중앙 문화와 이념을 지방에 이식하기 위해 왕조가 바뀌면 지리지 만들기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우리나라 왕조들도 왕권강화와 지방의 효과적인 관리를 위해 지리지를 편찬하였는데 고려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지리지가 처음이다. 삼국시대의 경우 지리 관련 문서를 작성하였을 것이나 남아있는 자료가 없어 확인이 어렵다.


김부식이 편찬한 지리지는 역사서인 삼국사기의 한 부분이며 1145년 고려 인종의 지시로 편찬하였는데 신라멸망 후 200여 년이 지난 시점이다. 편찬은 국가사업으로 추진하였으며 업무 총괄은 김부식이었고 감수국사監修國史라는 직책을 맡았다. 주된 직장에서 물러난 지 3년쯤 지난 뒤였다.


편찬 실무를 담당하는 8명의 참고參考를 두었는데 최산보 오온문 허홍재 서안정 박동계 이황중 최보우 등이다. 또한 2명의 행정실무인 관구管句 정습병 김충호를 두었다. 이들은 김부식이 선발하였을 것이며 가치관이 김부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지리지의 구성 및 내용


삼국사기는 본기 28권 지 9권 표 3권 열전 10권 등 총 50권이다. 이런 구성은 중국의 사서를 본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사마천의 사기는 본기 세가 열전 표 서이고 반고의 한서는 제기 표 지 열전인바 두 사서의 구성을 참조한 듯하다. 참고문헌은 우리나라의 옛 기록인 삼한고기三韓古記 고승전 화랑세기 계림잡전 최치원의 글 등과 중국사료이다


지志는 9권인데 1권은 제사와 음악 2권은 색복色服·처기車騎, 이용器用·옥등이고 3∼6권은 지리지 7∼9권은 직관지職官志이다.


지리지는 4권으로 524개의 지명이 나오는데 삼국 통일 이전 한자로 표기한 우리말 지명과 통일 후 경덕왕의 중국식 이름 마지막으로 고려 시대 초기 지명을 기술하였다.


신라지역과 고구려 백제지역의 서술내용이 다른데 신라 지역은 각 고을 연혁 명칭 변천을 간략히 서술한 반면 백제 고구려 지역은 행정단위 지명만 나열하였다. 이는 신라 멸망 후 200여 년이 경과한 시점이라 옛 자료 수집의 제한과 산라사를 중심으로 한 삼국시대 역사 인식의 경향이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또한 지리지에는 위치를 파악하기 어려운 미상지명未詳地名 목록이 포함되어 있으며 중국의 지리지인 한서지리지 송사 주군지 신당서 지리지 등을 참고하였다.


김부식 삶과 인간관계


1075년 태어난 김부식의 본관은 경주로 신라 무열왕의 후손이다. 신라가 망할 무렵 증조부 김위영이 왕건에게 귀의해서 경주 지방의 행정을 총괄하는 주장州長이 되었고 아버지 김근은 과거급제 후 고려의 조정에 진출했으나 일찍 죽었다.


김부식 네 형제도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관료로 진출하였는데 깁부식을 포함 3형제가 왕의 측근으로 임명되어 왕명 출납 업무를 맡아 세상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김부식 지식은 고금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는 평을 받았으며 벼슬이 상주국 문화시중 낙랑군 개국 후에 이르렀다. 두 딸은 인종의 왕비가 되었으며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송나라에서 편찬한 역사서인 자치통감을 얻어왔다.


그의 형제 이름에 식글자를 사용함은 중국의 문학자이자 정치인인 소식을 흠모한 결과라 한다. 그는 상주국 낙랑군 개국 후라는 벼슬도 엮임 했는데 이 또한 중화 따라 하기의 그늘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상주국은 중국의 분열시대에 자주 보이는 명예가 큰 관직이고 낙랑도 한사군의 지명이었으며 경주의 별칭이기도 했다.


자주파인 서경파와 대립하고 서경천도를 반대하였으며 자주파인 정지상 묘청 등을 제거하는데 중심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죽은 지 26년이 지난 후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어 참수하는 부관참시의 큰 치욕을 당하였다.


김부식의 장남 김돈중이 1144년 섣달그믐에 유행하던 잡기雜技 자랑 행사에서 자신보다 훨씬 나이 많은 정중부 장군의 수염을 촛불로 태우는 재주를 보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정중부는 화를 내고 욕을 하였는데 김부식은 자식의 무례를 탓하지 않고 오히려 왕에게 고발하여 매질을 당하게 하였다. 김부식 나이 69세의 일이며 1170년 무신난이 일어나 김돈중은 처형되고 김부식은 두 번 죽게 된다.


이런 부분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김부식은 현존한 우리나라의 최고 지리지를 편찬하여 현재 지명의 변천 상황을 알려주며 고대 우리말 지명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이때의 지명을 살펴보면 지명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일종의 타임캡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리지의 편찬을 개인이 아닌 국가의 업무로 추진한 경우 그 목적이 국가 발전과 중앙집권제 강화를 위해 필요한 지방의 자료 확보인데 그가 편찬한 지리지 내용으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었을까?


또한 고구려 백제 영역의 경우 이름만 나열하였으며 고구려의 영토였던 평안도의 대부분 함경도 그리고 만주지역의 지명에 대해 소홀하였다. 이는 편찬당시 이미 자료 확보가 불가능했을까 아니면 우리 땅이 아니라고 여기고 크게 주의하지 않았을까?




keyword
이전 17화지리 지식은 출세의 디딤돌, 이길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