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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해영 Aug 30. 2023

서쪽 고기잡이의 방파제, 전횡(설화)

인품은 국적 따지지 않는다

 

군산의 어청도, 보령의 외연도와 녹도에 전횡의 설화가 있다. 그는 중국 산동지방 사이었는데  우리의 서해섬 주민들이 수호신으로 모셔왔으며 지금도 당제를 지내고 있다.    

 

어찌 된 일인가-     


옛날 중국에서 항우와 유방이 대륙의 패권을 놓고 크게 싸웠었는데 승자는 유방이고 패자인 항우는 자결하였다. 그런데 항우의 부하였던 전횡과 그를 따르는 500여 명은 중국 동쪽 바다를 건너 오호도로 피난을 하였다는 전설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중국역사서인 사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유방이 전횡의 충성심을 높이 사서 자기편으로 삼고자 벼슬을 내리고 유방의 근거지인 서안으로 오라고 하였다. 전횡은 부름에 응하여 서쪽으로 가다 낙양 근처에서     

 

“나도 한때 산동지역의 왕이었는데 이제는 섬기는 주인을 바꿔야 하다니” 탄식을 하고는 자결을 해버렸다. 그를 따르던 500녀 명도 뒤따라 목숨을 버렸다.     


우리나라에서도 전행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이제현, 정몽주, 이색, 이숭인, 권근, 정도전 등의 유명인사들이 그에 대한 찬양의 글을 지었다.   

  

조선이 개국이 되자 전횡의 추모 분위기는 바뀐다. 즉 전횡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자결을 한 사람이므로 왕조 입장에서는 고려 유신들의 반발이 지속되고 있어 전횡은 달갑지 않은 인물이 된 것이다.   

  

그러다가 임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왕조는 충성을 바라는 분위기로 다시 바뀌게 되는데 이에 전횡이 딱 어울리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전횡과 500 여인이 피난한 오호도를 충청도의 어느 섬으로 규정하거나 옛 자취를 자세히 살펴보라는 어명등이 등장하게 된다(승정원일기, 영조실록).     


전횡 일행이 바닷길로 피난했다는 오호도(鳴呼島)는 어디일까? 우리나라 어청도의 지명 유래를 보면 전횡이 중국을 떠나 바닷길로 삼 개월쯤 항해하다 어떤 섬을 발견하게 된다. 


발견 당시는 안개가 자욱하여 섬의 형태를 알 수가 없었는데 다음날 아침 안개가 벗겨지자 푸른 산이 눈앞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래서 섬의 이름을 푸를 청자를 써서 어청도라 불렀다 한다.  

   

당나라 시인 한유는 전횡을 추모하는 시를 지었으며 중국 산동성 앞바다에 전횡도라는 섬이 있다. 이 섬에는 전횡을 제사하는 사당도 있다 한다.     


따라서 전횡과 관련된 오호도는 우리나라의 어청도, 녹도, 외연도와 중국의 전횡도가 있다. 이들 섬은 우리나라와 중국 사이에 있는 서해바다에 있다.

     

왜 한국과 중국의 섬에 전횡의 이야기가 있는가?


우리와 중국의 교류통로는 조선시대 이전까지는 압록강을 거치는 육로가 아니고 서해 바닷길이었다. 중국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시대에 한반도에서 중국본토를 건너는데 3일이면 충분하였다고 한다. 우리의 선박기술과 운항능력은 매우 뛰어났던 것이다.   

  

그래서 고대의 서해는 육지 사이에 있는 내해처럼 여겼으며 교류와 이동이 빈번하였다. 14세기 명나라 건국 무렵 중국 동해안의 왜구를 소탕하니 많은 무리가 고려로 도망을 하였다는 중국 측의 기록이 보여주듯이 서해를 통한 양국인의 교류는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전횡이 왜 우리 섬사람들의 숭배를 받게 되었을까?


먼저 서해는 한국과 중국의 교류를 막는 국경이 아닌 공유 통로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로 바다를 의지하고 살아가야 하는 섬 사랍들에게 풍어와 조업의 안녕을 기리는 마음의 기대처가 필요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사시로움을 쫒지 않는 마음과 배반하지 않는 충성심, 그리고 함께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보살피는 전횡은 섬사람들에게 큰 공감을 일으켜 수호신이 되었던 것이다.


이지지는 픽사베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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