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산의 기원이 상이하다?

(강토에 서서 산하를 바라보다 제23화)

by 오해영

지명유산은 선조가 남긴 가치 있는 전통이디. 이 유산은 아주 오래되었기에 제대로 이해하려면 어떤 문헌에서 출현하였는지는 물론 기록 시기 및 내용을 살펴봐야 한다. 특히 한국과 중국의 지명유산을 비교하려면 더 주의하여야 한다.


한반도의 진辰 한韓과 중국의 9주州는 아주 오래된 지명유산의 대표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이 언급되는 문헌 역시 아주 오래되었다. 그 내용도 단편적이거나 다른 시각으로 서술되어 있다.


더욱이 우리의 지명유산의 출처는 모두 중국 역사서이다. 이 문헌들은 그들이 역사를 보는 관점에서 그들의 필요에 따라 내용이 편집되었을 것이다. 또한 역사서이다 보니 시간과 사건을 중요하게 다룬다. 그러나 중국의 지명유산 출처는 지리지이다. 지리지는 산천 물산에 초점을 두고 구성되어 역사서와는 다르다.


중국 9주의 기원은 지리지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9주의 기원은 지리지인 우공, 서한 시기 글자 해석 책자인 이아, 전국시대 초나라 죽간인 용성씨이다. 이들은 지리지의 초기 모습이며 중국지리의 시작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9주는 먼저 개념이 생기고 후에 각각의 주에 대한 이름이 나왔다. 춘추시기 이전 갑골문이나 청동기 명문에서 9주의 이름이 발견되지 않는다. 춘추시기에 이르러야 문헌에서 9주의 표현이 출현하나 9개 주州의 이름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9주는 하나라 건국자인 우임금의 치수 이야기와 관련되나 하나라 때가 아닌 훨씬 늦은 춘추시기에 기록이 나타난다. 치수 이야기가 실제 시기보다 약 1500년 후에 문헌에 출현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춘추시기 들어서면 중앙 왕조인 주 왕실의 권위가 추락하여 지방 제후에 대한 통제권이 약해진다. 이에 따라 지역의 제후들은 자기 영역에 대해 주왕실의 시각이 아닌 자기들의 관점에서 지리를 파악하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제후들의 이런 노력이 주변국에 전해지고 종합되어 실제 지리에 부합되게 보완되었다. 이전 9주 내용에서 신기하고 이상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삭제되어 비로소 9주는 중국 실제 지리와 상당히 부합된 것이다.


그래서 우공은 춘추전국시기 끊임없이 개정되어 현재 중국인이 알고 있는 지리서가 되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천하를 상징하고 중국의 대명사로 인식하게 되었다.


우공의 9주는 익주 연주 충주 청주 서주 상주 형주 예주 양주 등이다. 이아에서 9주는 익주 예주 옹주 형주 양주 충주 서주 유주 영주로 표현되어 있다. 우공과 비교하여 약간의 차이가 있다. 또한 용성씨에 9주 명칭은 협주 도주 경주 거주 형주 양주 서주 차주 우주로 앞의 두 문헌보다 차이가 훨씬 크다.


이처럼 우공 이아 용성씨에서 언급하고 있는 9주 이름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거 9주에 관련된 이야기도 출처가 다르다. 즉 초장왕이 주나라 왕실의 관리인 왕손만에게 9주에 대한 물음은 용성씨에서 나오며 그의 대답은 우공에 있다.


이처럼 문헌마다 9주의 이름과 관련된 이야기가 다르나 서로 연계하고 종합해 보면 우공 이아 옹성씨 세 문헌이 9주의 기원이라 볼 수 있다.


전국시기에서도 9주의 각기 이름은 확실하게 결정되어 있지 않았다. 이는 9주의 추론은 여전히 어렵고 9주 중심 천하관은 아직도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후한시기 반고가 편찬한 한서 지리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옛사람들은 9주 개념은 처음과 같지 않으며 시대 발전에 따라 끊임없이 보완되어 왔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현재 중국인이 보는 9주는 전국 시기 이후에도 끊임없이 개선보완되어 중국 지리의 상징이 되고 중국의 대명사가 되었으나 그 경과를 살펴보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부분이 상당히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한반도의 지명유산은 역사서에 있다


중국의 경우와 다르게 우리의 지명유산의 기원은 역사서나 그의 부속물인 지리지이다. 우리의 지명유산인 진辰이나 한韓의 경우를 보자. 사마천의 사기, 반고의 한서지리지, 진수의 삼국지 오환선비전 그리고 범엽의 후한서 광무제 본기와 동이전등에 이들이 출현한다.


사기에는 진국이 나오고 한서지리지에는 고구려현 대방현 조선현 패수현이 언급되어 있으며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에 한 부여 고구려 동옥저 읍루 예 왜가 있다. 한은 마한 진한 변한으로 위치는 대방현 남쪽이고 마한에는 목지국 백제국등 50여 나라 이름이 있다.


후한서 동이전에는 삼한에 78개 나라 이름이 나열되고 만주를 고조선 영역으로 한반도를 삼한 영역으로 기술하고 있다. 후한서 광무제 본기에는 동이에 세 한국이 있으니 진한 변한 마한이다고 하였다.


이상의 중국의 역사서에서 한반도 지명 유산인 진과 한이 보이며 그 내용도 시대 흐름에 따라 진에서 한으로 표현이 옮겨지며 내용도 구체화됨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진이 한으로 이름이 바뀌고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 한의 시작은 언제부터 일까?

기원전 194 고조선에서 쫓겨난 준왕이 부안을 거쳐에 익산에서 건마국을 세운 후 한왕이라 자칭하였다 한다. 이 지역은 이전에 진국으로 불렸었다.


서기전 2세기 진국은 고조선 유민과 위만 조선의 망명민을 수용해 강력한 연맹체 국가로 성장하고 서기전 1세기 중엽 진한 지역의 소국들이 독자적으로 왕을 세워 신라라 칭하고 진국에서 이탈하였다. 그러자 마한지역의 소국들도 통합되어 백제가 되었다.


진국에서 진한이 이탈하자 진왕의 영도력이 약화되어 갔다. 마침내 진국은 진한 마한 변한 세 권역으로 나뉘게 된다. 마치 중국 주왕조가 쇠약해지자 각 지역의 재후들이 자기들의 지리관을 수립해 가는 과정과 유사한 점이 있다.


한이라는 이름이 중국인에게 알려진 시기는 1세기 전반기인 후한 광무제 이전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우리는 삼한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삼국통일 이후부터이며 요하 동쪽의 지역을 표현하는 지명이었다가 신라말 고려초에 한반도 전역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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