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터의 지리 인식이 다르니 공존과 강탈이 초래되다

(강토에 서서 산하를 바라보다 제24화)

by 오해영


우리는 지리적 시각으로 자신과 주변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을 파악하고 더 넓은 지역으로 확장해 간다. 이때 지리의 지식은 유익한 정보다.


아주 먼 옛날 지명 유산이 만들어지던 시대 한반도와 중국 땅에 사람들은 어떻게 지리를 인식하였을까?

이 시기 지리인식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생활 반경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농경 사회라 그 공동체의 생존에 필요한 만큼의 농산물이 생산되는 범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생활 공동체의 범주는 지형에 의지하여 생산하고 살아갈 수 있는 규모로 여기저기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


한반도의 경우 농경에 적합한 자연환경을 갖춘 곳이 여기저기 많았다. 이들은 규모의 크기가 서로 비숫하였기 때문에 이를 기반으로 하는 생활공동가 상당히 많이 존재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공동체 상호 간에 식량 약탈이나 특산물 상납을 강요할 필요가 적어 생활 공동체끼리 병존하며 생존해 갔다.


그러나 중국 땅의 경우 달랐다. 한반도 보다 훨씬 넓은 지역에 이질적인 부족의 공동체가 많았다. 거기에 상이한 자연여건으로 생산력의 차이가 크며 특산물도 많이 달랐다. 이러한 공동체의 차이는 서로 간에 약탈이나 상납을 요구하는 경우가 횡행하였다.


그리하여 힘이 센 공동체가 약한 공동체의 톡산물이나 노동력을 약탈하는 약육강식의 원리가 작동하다 보니 강한 자는 더 가지려 하고 약한 쪽에선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생존이 이어졌다. 그리하여 자신과 주변의 지리를 제국적 시각으로 인식하는 개념이 싹텄다.


이처럼 한반도와 중국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지리인식의 차이는 정치 체제의 성격과 맞물리며 공존과 빼앗는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지리관으로 이어졌다.


중국, 전쟁과 강탈 속에서 형성된 제국적 지리인식


고대 중국인의 세계관인 중화주의를 지리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영역을 중심과 주변으로 나누고 중심에는 문화 정치 경제적으로 우월한 중화인이 살아가는 지역이고 주변은 문명이 낮고 뒤떨어진 오랑캐가 사는 지역으로 위계질서를 만들었다.


즉 천하를 지리적인 시각에서 어떤 틀을 만들고 위계를 구분했다. 그 중심에는 화하華夏가 자리하고 주변은 다른 종족이 살아간다. 중심에 가까울수록 문명화된 공간이고 멀어질수록 교화의 대상인 오랑캐의 영역으로 바라보는 지리관이 형성되었다.


이외 같은 지리관을 갑골문, 우공 9주, 산해경을 통해 그 내용을 알아보자. 상나라의 유적인 은허에서 출토된 갑골문을 보면 상나라 사람들의 지리인식의 표현이 있다. 세계를 자신의 위치를 기준으로 사고풍사四告風四라는 4방향으로 표현하고 지역의 크기에 따라 좁은 지역의 지명인 주인방人方과 넓은 지역의 지명인 동토東土 남도南土등이 있다.


이는 상나라인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기준이 자기를 중심에 놓고 주변을 동서남북 방향으로 구분하며 가까운 곳과 먼곳을 나눠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상나라는 주변 지역을 차지하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노예로 활용하기 위해 수많은 전쟁을 벌였다. 이런 전쟁을 치르려고 왕이 수도인 대읍상大邑商을 벗어나 출정할 때마다 이미 아는 길에서 점을 쳤다.


이는 상나라인들이 대읍상 밖의 지역에 대해 잘 모르며 위험한 공간으로 여겼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풍족한 삶을 위해 주변지역의 토지와 백성을 빼앗는 제국주의적 사고체제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산해경의 천하 인식 내용을 보자. 천하의 중심에는 겹겹의 산으로 싸인 핵심지가 있고 핵심지와 거리가 가까운 곳은 해내, 더 먼 곳은 해외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해외 밖은 대황이라 칭하였다.


핵심지의 각 산에 대해 귀중한 물산과 제사 풍습이 기재되어 있으며 해내 해외 대황에 이르면 지리와 물산의 언급이 줄어들고 신기하고 기묘한 신화의 세계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지리 정보의 밀도 차이가 만들어낸 초기 지리 서술의 한 형태라 볼 수 있다. 여기서도 핵심지와 그 이외 지역을 그들의 지리적 시각에 따라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공 9주를 보자. 화하족의 강역의 범위는 9주로 나눠 인식하고 9주 각각의 지리현황을 간결하고 명확하게 인식하였다. 이러한 지리 인식이 사고체제를 이뤄 천하관을 형성하게 된다. 물론 이런 인식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라 시대가 흐르면서 그렇게 되어갔다.


우공 9주에서는 산해경에 나오는 신비하고 기묘함은 없어지고 대신에 물산자원 지리특징 인문풍습 교통노선이 표현되었다. 각주의 주성州成을 정하고 주성 내 큰 산과 강 호수 및 평원을 표기했다.


그리고 각주의 토지종류 비옥도를 묘사하고 공물등급을 규정했다. 마지막에는 각주의 민속 특산과 공물을 중원으로 상납하는 교통로를 표시했다.


9주를 산해경과 서로 비교하면 산해경의 신비성이 제거되고 각 주의 산·강·토질·공물·교통로를 체계적으로 정리됨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우공 9주는 이러한 지리인식은 곧 지배와 수취를 위한 행정체제로 편성된바 이는 제국주의적 지리관의 표현인 것이다.


전국시대에 이르면 9 주는 영역적으로 크게 확대된 대 9주 개념으로 발전하며 중국인의 마음속 천하 지리를 광활한 신주神州로 여기게 된다.


이렇게 된 원인은 다음과 사정을 들 수 있다. 즉 서주 이후 제후가 많이 생기고 자기 국가를 더 잘 통치하기 위해 자기의 문헌계통을 세우기 시작했다. 진나라의 승, 노나라의 춘추 등 나라마다 역사지리책을 편찬하였다.


이런 역사 문헌에는 제후 자기 나라의 지리 물산 민속 교통등 등 지리지 정보가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제후 간의 교통과 교류는 끊임이 없었고 이런 과정을 통해 지리정보가 교환 조합되었다.


그리하여 전국시기에 이르면 9주는 광활한 대지를 의미하게 되어 중국인의 사상체제에 녹여 들어갔다. 이러한 지리관이 발전 확대되어 지리적인 측면에서 천하를 통일하는 제국적인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다.



한반도, 교류와 경계 속에서 형성된 공존의 지리관


반면 고대 한반도인의 지리인식은 중국의 경우와 다른 무늬를 보인다. 진국과 삼한의 지리적 범위는 한반도 중남부로 서로 상당 부분 겹쳐 이 두 개 단어는 지리적으로 연결된 흐름을 보인다.


진국은 비교적 추상적인 지역을 나타내는 지명이었고 이후 마한·진한·변한으로 나뉘며 각기 중심 영역을 가진 바, 이는 지리 인식의 구체화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오늘날과 같은 명확한 경계선이나 촘촘한 행정 체계를 갖춘 게 아니라 여러 읍락과 소국의 연맹형태였다.


그리고 각각 관리하는 영역은 고정된 선이 아니라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였고 각 읍락과 소국은 경쟁 교류 및 경계하며 생활하다 보니 영향력의 범주는 유동적이었다. 중국을 바라보는 인식도 지배 종속의 관점이 아니라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교섭의 대상으로 보았다.


진국과 삼한에서 인간은 하늘과 직접 연결된다는 인식이 강하여 제사를 하늘에 올리고 왕은 하늘과 인간을 매개하는 존재로 여겼다. 이웃 생활공동체와 병존하는 세계관이었던 것이다. 이는 천하를 지배의 관점으로 위계화하며 천자는 하늘을 대리한다는 중국의 지리관과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다시 말하면 고대 중국의 지리인식이 천하를 하나의 질서로 통합하려는 제국의 시각이었다면 진국과 삼한의 지리인식은 삶터의 경계 위에서 교류와 경쟁을 조율하는 병존과 공존의 시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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