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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해영 Nov 15. 2023

매뉴얼만 따라 하지 마!(주자 설화)

   

이번 주말 직접 가봐야 할 결혼식이 있는가? 주중에 조문을 해야 할 곳은?  

   

애경사의 빈도는 사회인이 되어가는 것과 관계가 깊다. 사회생활의 인연이 쌓일수록 마음을 표시해야 할 경우가 늘어난다. 


이제는 퇴직 후 몇 년이 흘러 애경사가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사회생활 때의 인연이 아직도 이어져 이런저런 신경을 쓸 경우가 생긴다. 알게 된 애경사 중에서 직접 찾아볼 경우와 찾아보지 않고 부조만 하는 기준은 퇴직 전과 후가 많이 달라지는 것 같다. 업무 하다 맺어진 관계가 이젠 업무가 없으나 그래도 인간관계는 일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애경사에 성의를 나타내는 방법은 대부분의 경우 부조금을 은행계좌로 송부함으로써 마음 씀과 행위를 다했다고 여긴다. 그리고 상당 부분은 애써 모른 체 하나 마음은 많이 불편해진다.


사회생활을 할 때에도 애경사의 형편에 부합하는 마음과 행동을 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 외견상 분위기에 맞는 언행을 하려고 하지만 대부분은 눈도장을 찍음으로써 체면치례를 다했다고 생각하고 바로 식사 장소로 이동해 버린다. 이런 모양으로 자리매김된 애경사 챙기기는 언제까지 해야 할까?   

   

예전의 관혼상제에서 당연히 해야 할 마음가짐과 행위는 어디로 간 것일까? 다른 사람들은 어떠할까?     

     

전통시대에 관혼상제는 선조의 덕을 기리고 공동체 구성원 간의 화합을 다지는 역할을 하였으며 개개인이 속해있는 공동체의 확인과 발전을 위해 필요했었다. 또한 구성원 간의 만남에 따른 관계 기준과 개인사 보다 공동체의 일을 중요시하기 위해 규범이 필요하여 이를 제도화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주자가례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관혼상제의 표준 매뉴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자생이 아닌 전통시대 중국의 가례였다


이 가례가 생성된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일천 년 이전의 중국 남송시대로 귀족 사화가 붕괴되고 사대부 중심의 관료사회가 구축되는 변화의 시기이었다. 그래서 지식계층은 민생을 중시하며 사회구성원들에게 책임을 느끼는 기풍으로 이런 가례가 만들어지게 된다.   

  

그런데 이 가례가 주자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아 사회 질서를 구축시키고자 했던 조선 사대부를 중심으로 보급되면서 특정인물과 특정생각을 맹신을 하게 되어 주자가례가 왕실에서부터 백성들에까지 온갖 기준과 행위에 깊은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사대부의 관리를 받는 설화층의 생각은 어떠하였을까?     

 


설화를 보자            

   

예법과 달리 제사를 차린 주자  

 

주자는 실제로 자기가 행한 가례는 가르치는 것과 달랐다. 그래서 제자들이 글공부를 하다가 하루는 

“오늘 주자선생님댁에 제사가 있다지? 우리 실습을 한번 가자.”     


가서 보니 엉망이었다. 차리는 것도 그렇고 지내는 순서도 틀리고 절도 이상하게 하고.

제사가 진행 중일 때는 말을 못 하고 있다가 절차가 끝나고 나자  부끄럽지만  긍금해서 제자들이 주자에게 물었다.     


“스승님! 저희한테는 준비는 이렇게 이렇게 진행하라 하셨고 행사는 저렇게 저렇게 순서로 하라고 하셨는데 스승님은 아주 틀리게 하셨네요?”     


이에 주자선생님은 뭐라고 했냐면,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거는 예법이고 내가 오늘 행한 것은 우리 집의 풍습이다.”

“내가 뭐 대단하다고 우리 아버지 우리 할아버지 우리 증조할아버지 우리 고조할아버지가 했었는데 내가 바꾸니?”


“나는 할아버지가 했던 대로 아버지가 했는 대로 나는 한다.” ???

“너희들은 이거 모른다고 나한데 와서 배우니까 나는 예법대로 가르칠 수밖에 없지 않으냐?” 

    



탈공동체, 탈가족, 혼자 살아가는 시대에 맞는 매뉴얼은  

  

지금을 살고 있는 가족 공동체는 부모와 자식위주이며 가까운 혈육인 삼촌 이모 사촌은 정서상 이젠 가족공동체 테두리에 넣기 곤란해지고 있다.

 부모 자식 위주의 경우도 학업이나 직장 때문에 구성원들이 공동체를 떠나 별거 생활을 많이 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의 영향으로 과거 전 세대원 간의 상부상조하는 공동체가 이젠 장년연배 위주의 지속성이 어려울 공동체로 바뀌고 있다.   

  

그리하여 수 백 년간 우리 사회생활을 주재했던 주자가례는 이젠 책으로 그것도 보는 사람이 없는 책장의 책으로 들어가 버렸다.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가례가 시대가 바뀌어 잊힌 유물이 돼버린 것이다.

너무 빨리 잊혀 버린 것은 아닐까?       

   

지명소개     


대구와 김천에서 찾아볼 수 있는 설화로 대구는 통일신라 경덕왕 시기에 정치적 중요도를 고려하여 대구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김천은 교통요지로 지명의 두 번째 글자를 山과 川 중에서 택하게 개명하게 한 원칙에 따라 시용하게 된다. 


   

설화층이 생각하는 주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주자(이름은 희)는 1130년에서 1200년 살았던 중국 남송시대의 대학자이다.  관직도 있었지만 주로 한직이었으며 말년에 황제의 측근이 되나 직언을 서슴지 않다 45일 만에 쫓겨나고 말았다. 그래서 평생을 가난하여 친구의 죽음에 부조조차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때 주자는 어떻게 가례를 지켰을까?

   

자주 금주선언을 하지만 실패하고 자식걱정 많은 평범한 가장이었으며 말년에는 외롭고 쓸쓸했다.

또한 죽을 때까지 공부하고 책을 저술하였으나 정부로부터 사이비 학문으로 낙인찍히고 제자들도 벌을 받고 흩어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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