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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해영 Jul 05. 2023

부인에게 먼저 차인 강태공(설화)


강태공은 3000 여전 인물로 역사서 사기에 성공한 제후로 소설 봉신연의에 신으로 묘사된다. 조선시대에 한글소설 강태공 전까지 나오게 된다.  설화에서는 무책임하고 매정한 남편으로 부인을 대한다. 성공 스토리에 힘입어 신의 반열까지 오른 삶이 왜 설화에서는 망가질까? 혹시 수신제가나 가화만사성과 같은 개인 가치를  사회적 성공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을까?


⑴ 설화 내용

 강태공 설화는 정읍 등 10개 시군에 12가지 이야기로 부부관계에 관한 내용이다.


▪강태공 출세 전

 강태공은 70세를 바라보지만 독서나 낚시를 하는 등 집안 살림은 돌보지 않는다. 부인은 남편 대신 진주의 앞뜰에서 강피를 훑는다든지 또는 마당에 피죽을 널어놓고 비가 오면 걷으라고 부탁을 하고 일을 간다. 그러나 독서만 하다가 비에 다 적신다.


절에서 수십 년 공부 후 집에 와서는 여러 장사를 하나 실패하고 점치는 일만 제법 된다. 그러면서 빚 대신 여자를 얻어 산다. 부인은 열심히 가정을 책임지다가 끝내는 참치 못하고 가출해 버린다.


▪강태공 출세 후

 강태공은 경삼감사가 된다든지 왕의 스승이 된다. 성공 소식을 들은 부인은 찾아와서 재결합을 요청하나 한번 내쏟은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다며 거부한다.


▪부인의 사후

  고생하다 죽어 서낭신이 되었으나 오가는 행인의 욕받이가 된다.


⑵ 강태공의 실제 행적과 설화와의 관련?


 ▪강태공의 일생

  중국 동해 바닷가에서 태어나 데릴사위가 됐으나 쫓겨난다. 그 후 중원의 조가로 유랑을 떠나 그곳에서 도살, 여관, 술집, 점쟁이 등 일에 종사하면서 상나라 말기의 혼란 중에서 세상의 변화와 대응 방략을 읽어낸다. 서쪽으로 이동하여 위수에서 낚시를 하다 주 문왕의 왕사가 되고 주 무왕을 도와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산동지역을 봉토로 받아 제나라의 시조가 된다.


그를 수식하는 말들은 기다림의 끝판왕, 최고의 스승, 전략의 일인자, 사상의 대종사 등이다. 


▪설화와 관련이 있는 행적

  강태공이 부인의 재결합 요구에 응하지 않은 것은 데릴사위에서 쫓겨난 행적과 관련이 있을까? 

그는 지식으로 출세를 하려 하고 시골에서 서울로 여행 등을 고려하면 노동을 하지 않거나 재력이 뒷받침이 되는 계층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가정의 경제를 몰라했다거나 부인이 끝내는 더 못 버티고 가출을 해 버렸다는 설화는 다른 의미가 있을까? 그가 살았던 시대는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변화하는 시대였을 수도 있다.


⑶ 설화 채집지역의 지명 개명 관계


설화가 채집된 지역의 특징을 내 나름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지명 개명을 매개로 중앙과 지방의 주류계층의 다툼이나 장애가 적어 여러 번 개명을 할 필요가 적었을 지역이 많다(10개 중 6개 지명이 신라 경덕왕 때 개명 후 현재까지 사용).


두 번째 수차 개명은 하였으나 개명 주도세력 간 다툼이 적었을 지역이다(고려 태조 2개소, 조선 말기 2개소).

세 번째 현재도 옛 풍습이 잘 보존이 되고 있거나 생활이 넉넉한 사회의 특징이 있은 지역일 가능성이 있다.


⑷ 감상법


왕조시대 우리 선조들은 어떻게 강테공을 알았을까? 사회 주도층은 한문서적으로 양반층 여성이나  살림이 넉넉한 계층은 한글소설을 통해서 기억하였을 것이다. 설화에 관심이 적었을 이들은 강태공을 성공한 상남자로 이해하여 비인간적인 면모에 관심이 별도 없었을 수도 있다.


글자도 모르는 백성들은 설화를 통해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재미있게 그의 이야기를 즐겼을 것이다. 설화층과 같은 고된 일을 한 경력이 있고 백성을 힘들게 하는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시대를 연 강태공에 대해 동질감 또는 고마운 인간으로 생각하였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를 보통 남자로 변화시켜 친근감을 높이고 부인을 박대한 이야기로 강조하여 흠결이 있는 인간적인 면모를 나타내 보려 함은 아닐까? 아니면 왜란과 호란을 겪은 후 사회질서가 무너져 가는 시대에 접어들어 부부 윤리를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었을까?


마지막으로 강태공은 여러 성씨의 시조로 모셔져 있어 자식이 여러 명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부부가 몇십 년을 살다 보면 인생의 동반자처럼 되어가는데 황혼이혼을 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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