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동일지명 현상 설명서 3-5)
지명은 땅의 이름이며 사람은 땅 위에서 살아가고 땅의 산물로 생존해 간다. 그러면서 지명과 삶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따라서 지명을 알아감은 땅과 사람의 관계성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한국과 중국에 진주晋州시가 있다. 한국의 진주시는 경상남도에 위치하고 중국의 진주시는 허베이 성 석가장시가 관리하는 지역인데 현재의 진주 이름이 나오기까지의 여정과 지명의 생명력이 닮았다.
진晋 글자의 뜻도 나라, 해가 솟아 나아가다 등 번영과 발전을 의미하여 진주 이름의 본색을 말해준다.
한국의 진주는 한반도 남부지방 지리산 동남부 일대의 중심지역이다. 진주 이전 지명의 생겨남과 사라짐의 과정을 보면 변화가 무척 심했다. 처음 지명은 자타(子他)인데 고령가야 시기이다. 이 지역이 백제 영향권으로 편입되어 거타(居它)로 불렸고
통일 신라 초기에 청주(菁州)로 불리다 통일 신라 중기에 강주(康州)로 개명되었고 신라말기 청주로 환원되기도 하였다.
995년 고려 초기에 진주라는 이름이 비로소 등장하여 이후 쭈욱 사용된다. 조선말에 행정위계가 강등(목에서 군으로)되나 이름은 강한 생명력을 발휘하여 생존해 왔다.
그러나 1939년 일제 강점기에 진양군으로 바뀌어 진주 이름이 사라지나 해방 후 1949 진주의 이름을 회복하고 1995년 진양군을 흡수하여 현재의 진주시가 탄생하였다.
중국 진주의 경우 춘추시대에 기국이라는 국가가 있었다고 하며 기원전 6세기 백적족이 구국을 세웠으나 곧 진(晋) 나라에 의해 멸망하나 진(晋) 글자와 인연을 맺게 된다. 6세기 북위 왕조 때 진주라는 지명이 처음 선을 보여 이후 500여 년간 살아간다.
수나라 송나라 시기에 잠시 사라지기도 하나 1215년 원나라 시기 진주는 회생한다. 청나라 시기 진현으로 강등되나 진 글자는 살아남아 중화민국까지 지속되다 중화인민공화국 시기인 1958년 진현과 심택현 합병하여 진주시로 나타난다.
한국의 진주시는 남강이 중앙부로 흘러들어 시가지를 북부와 남부로 양분하는데 옛날에는 진주시 남쪽으로 돌아 흐르기 때문에 남강이라 했다. 또 진주성 남쪽을 휘돌아 동쪽으로 흐르는 곳의 이름을 촉석강(矗石江) 또는 촉성강(矗城江)이라 한다.
남쪽과 서쪽에서 불어온 습기 머금은 구름이 지리산과 덕유산에 부닥쳐 비가 내리면 대부분의 빗물이 진주 윗부근에서 남강과 합류하여 진주에 홍수를 안기곤 했다. 외곽 북남동 방향에 100m 내외의 낮은 산들이 위치하며 동쪽과 남쪽은 평야가 자리 집고 있다.
청주와 강주 이름에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청주는 이 지역의 기후와 자연을 표현한 이름으로 토산 지형에 무성한 숲과 구불구불 흐르는 강물이 어울린 산수 풍광을 묘사한 이름이다. 그래서 이때 진주에 흐르는 강은 청강(菁江)이라 했다. 그러나 청주(菁州)는 100년을 채 살아가지 못했다.
강주(康州)에서 강은 중국의 서북 천산산맥 건너에 있었던 강거(康居) 또는 강국이라는 나라 명칭에서 기원한다. 강국은 일시적으로 당나라의 관할에 들어간 때도 있었으나, 전통적으로 중국 영역의 바깥이 있던 지역이다.
중국 서역의 지명을 따 온 이유는 이곳이 신라 영역에 가장 나중에 편입되었으며 당시 서울인 경주에서 아득히 멀어 교류가 적고 중앙 권력이 잘 미치지 못해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강주는 200여 년간 사용된다.
또한 신라 말기 강주의 지배자는 독자적으로 중국에 사신을 보내고 중국 후당의 임금으로부터 강주지사라는 벼슬을 받기도 하는 등 마치 독립국가처럼 행동하였다.
고려 왕조는 중요 지역의 지명에 주 글자를 붙였는데 이곳에 주(州)를 설치하면서 진주라고 이름 짓었다. 또한 조선에서도 태조 부인인 강 씨의 외가이었으며 비봉산을 진산(鎭山-고을을 지켜주는 산)으로,
진주에 속한 지리산과 옥산을 명산, 남강과 두치진을 대천으로 지정하여 정기적으로 제사하였다. 국왕의 상징인 전패(殿牌)를 비봉산 아래 고경리 객사에 모시고 관민이 군신 관계의 의식을 수행하였다.
따라서 청주가 대표하는 생기발랄한 자연풍광, 강주가 의미하는 먼 지방, 진주라 천리길 노랫말처럼 서울에서 먼 지방이다는 의미가 지명에 스며있다.
중국 진주시는 허베이 성 중남부에 위치하며 호타하와 부양하라는 두강이 만나는 부챗살 모양 평탄지이다, 호타하는 년간 유량 변화 매우 커서 진주 주민에게 많은 재해 초래해 왔다. 그래서 호타라는 말도 강물이 도처로 흐른다는 뜻이다.
이 지역의 소국을 멸망시킨 진(晉)은 춘추시대 산시 성에 위치하였던 강국이었으나 나라가 망한 후 진이라는 나라 이름까지 사라졌다. 그러나 진에게 멸망당한 이 지역에 진 글자가 지명으로 살아있다.
진주라는 지명을 부여한 북위나 원 왕조는 농경이 아닌 유목을 위주 나라이었음에도 지방관리의 선정과 간신 몰아내기로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주 정부에 협조하여 농업생산이 증가하고 주변 지역도 이 지역의 백성을 따라 하니 나라에서 대우하기 위해 주를 설치하고 진주라 이름을 지었다.
한국 진주는 940 고려 시기 첫 등장하여 죽 살아가다 1939 진양군으로 잠시 바꾸나 대한민국이 들어선 후 인근 진양군과 합병하여 지금의 진주시로 발전해 왔다. 진주 지명이 나오기 전에는 수차례 개명이 있었으나
진주 이름이 생긴 이후 1천 년 이상의 삶을 살고 있다. 비록 그 중간에 격이 낮아지고 잠시 이름을 잃기도 했으나 바로 되찾아 살아나는 힘을 보이고 있다.
중국의 경우는 북위와 몽고 시절 진주로 개명되어 현재까지 살아있는데 약 550여 년의 나이를 먹었다. 진주라는 지명이 나오기 전에는 왕조가 바뀌면 이름이 따라서 개명되는 경향이었으나 진주로 명명된 후에는 비롯 잠시 사라지기도 하고 강등되기도 했으나 강한 생명력을 발휘하여 생존하고 발전하고 있다.
따라서 양국의 진주 지명에는 강한 생명력이 있으며 삶의 과정에서 잠시 사라지기도 하나 곧 회생하여 발전하고 있다. 그 형세가 글자의 뜻과도 부합된다.
지도 출처: 바이두, 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