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동일지명현상 설명서 3-7)
한중 양국에 상당이라는 지명이 있다. 이름도 지형도 상당히 특이한데 상上은 위 하늘 임금의 뜻이며 당堂은 집 학교 평평하다를 의미한다.
지명地名은 일정 지역의 위치와 범위를 인식하고 구별하는 언어로 땅의 생김새나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의 역사적 경험이 담겨있어 지역사 맥락과 지방 이해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한국의 상당구는 청주시에 속한 지역으로 마한 연맹체의 일원이었고 백제 때 상당현上黨縣이라 부르게 된다. 통일 신라 시기 서원소경 서원경으로 불려 서울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으며 고려시기 청주로 개명되었다.
연산군 시기부터 조선말까지 지명이 서원현으로 바뀌는 등 8차례나 개명된다. 1949년 청주시로 1995년 청주시 동부출장소를 상당구로 승격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청주시 면적의 43%를 점유하여 이름 그대로 면적이 상당하다.
중국의 상당구는 산서성 장치시에 속한다. BC 260년 진조秦趙 장평전쟁 후 진왕조의 영토가 되었으며 진시황의 통일 후 상당군이 설치되었으나 곧 폐지되어 사라진다. 오대五代 시대에 상당현이라 하였으나 1369년 명明왕조에서 폐현되어 사용되지 않고 있다가 2018년 장치시 상당구로 회복되었다.
두 지역의 상당 이름의 형성은 통일로 가는 도중에 출현하나 곧 폐지되어 상당 기간 사용치 않다가 현대에 들어서 이름이 회복되는 비슷한 궤적을 보이고 있다.
우리의 상당구는 청주분지에 있는데 이 분지는 해발 43m이고 주변은 해발 300m 정도의 구릉성 산지로 둘러싸여 있다. 반면 상당산은 해발 492m으로 청주 일대에서 제일 높다. 이 지역은 동서를 잇고 영호남을 연결하는 중요한 지리적 공간으로 한반도 입장에서도 동서와 남북을 연결하는 교통 요지이다.
그리하여 상당지역은 삼남의 요충 또는 목구멍과 같은 역할을 하여 군사상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여겨졌다. 삼국시대에 백제의 신라 방면으로 전진기지, 고구려의 남하지역, 신라의 서해안에 도달하는 지름길의 역할을 하였다.
후삼국시대에도 궁예·견훤·왕건과 연결된다. 궁예는 자신의 무장세력을 이곳에서 공급받았고 왕건의 근거지인 패서호족을 견제하기 위해 많은 주민을 철원으로 옮겨 궁예의 핵심세력이 되게 하였다. 인근 여타지역이 견훤의 세력이었던 점과 다르게.
이곳에 상당산성(둘레 약 4.3km, 면적 181천㎡, 높이 6~16m)이 있는대 조선시대 쓰인 상당산성 사적기에는 중국 상당은 하늘과 이어진 마을이며 이보다 높은 곳이 없고 더 높은 산이 없다고 서술하면서 우리의 상당도 중국의 상당처럼 땅이 아주 높고 하늘과 같아 꼭 다퉈야 할 지역이다라고 적고 있다.
우리 상당 지명의 유래는 추축 해보자. 상당지명은 백제 때 출현하였는바 중국의 경우 진시황 시기 잠시 사용되었으나 곧 사라졌다. 왜 백제에서 나타났을까?
몇 가지 방향에서 추론할 수 있는데 우선 중국 유이민과의 관련성이다. 진秦 말기에서 한 漢 초기에 중국대륙의 혼란함을 피해 한반도로 이주해 온 중국 유이민이 많았다.
이들은 특히 마한의 동쪽으로 유입되어 상당지역에 정착하였다. 또 낙랑 대방의 소멸 후 상당수의 한인漢人이 백제에 포섭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들에 의해 백제 시기 이 지역을 상당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
또 고려 초 중국식 성姓이 도입되면서 중국의 해당 성씨에 대응하는 중국의 지명을 봉호에 붙이는 현상이 생겨 상당 지명이 도입되었을 수도 있다.
영휴靈休가 1744년에 남긴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 중국 한韓 나라가 상당上黨이라 부른 내력에 해설하기를 하늘과 이어진 마을이라서 상당이라 했다 하면서 오직 우리나라 지형에 이곳보다 높은 곳이 없고, 이곳의 산은 이 산 보다 더 높은 산이 없어 이름을 상당이라 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중국 상당 지역의 경우 주변에 높은 산이 둘러싸고 중간은 기복이 있는 분지형의 지형으로 해발고도 800~1500m이며 산 위에서 제일 높은 곳을 상당이라 하였다.
또 상당은 중원과 인접하며 고도가 낮은 중원을 내려다보고 있는 형세를 이루고 있다. 순자荀子 의병편議兵篇에 상당上黨은 크기가 사방 수백리이고 성곽과 고을이 완전할 뿐 아니라 곳간에는 재물로 가득 찼는 곳이라 설명하고 있다.
동한의 유희劉熙가 지은 지명사전 석명에 당은 장소이며 산에서 그곳이 가장 높기 때문에 상당이다라고 기술하였으며 청나라 정은택程恩澤이 지음 국책지명고國策地名考에 땅이 아주 높아 하늘과 같아 상당이라 설명하고 있다.
이 지역은 전국시대 한韓나라의 영토이었는데 262년 한나라 상당지역 책임자가 진秦나라에 뺏길 처지를 염려하여 조趙나라에 넘긴다. BC257년 한나라가 수복하였으나 BC236년 진秦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면서 다시 진나라에 정복되었다.
왕조시대에 중원의 개념은 세상의 중심지로 이곳을 차지하면 천하를 얻는다고 생각했다. 신라에서 중원中原은 상당이 있는 청주와 맞닿아 있는 충주지역을 가리키는 地名이었으며 고려 성종 995 설치된 중원도中原道를 보면 중원은 국토의 중심에 위치한 넓은 지역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충북을 중심으로 경기도 강원도 남부 경북 북부지역까지 망라하였다. 이런 중원을 도모할 수 있는 지역이 상당이었다.
중국의 중원中原은 좁게는 황화하류의 하남성에 하북성 산동성 섬서성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넓게는 화북평야와 황토고원 일부까지로 확대된다. 중국의 왕조시대에 이곳을 차지한 자가 중국대륙을 통일할 수 있다고 의미를 부여하였다.
자료 : 프레츠, 바이두, 언스플래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