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동일지명 현상설명서 3-9)
왕조시대 전국적으로 지명을 바꿀 경우는 정치세력의 교체로 새로운 비전이 필요할 때이었다. 이때 중앙정부는 그들의 주장에 부합되는 기준을 제시하고 그것이 따라 개명을 하였다. 조선이 그랬다. 개국 후 고려왕조 시절 지나치게 승격된 지역의 격을 내리기 위해.
이때 기준은 호구수 즉 인구수이었는데 양양의 경우 기준보다 적으므로 강등되어야 했으나 권력자와의 특별관계로 오히려 승급하고 이름도 바뀌었다. 양襄은 농부가 농사를 짓는 모습의 글자로 돕다 뜻이 있다.
우리의 양양은 삼국시대 이전은 예국濊國에 속하였고 고구려 땅이 되어 지명을 갖게 되는데 익현현翼峴縣이라 했다. 통일 신라 경덕왕이 익령현翼嶺縣으로 개명하였다.
고려 1221년 몽고군을 격퇴시킨 공로로 양주襄州로 승격했다가 1257년 반역자와 손잡고 적에게 항복한 사건으로 덕령현德寧縣으로 격하당했으나 1260년 몽고와의 전쟁 종료 후 양주로 회복되었다. 여기서 주州는 지금의 도에 해당한다.
조선은 전 왕조 흔적 지우기 차원에서 주州 글자가 있는 지명을 개명하였는데 그 기준은 호구(가구수, 주인에게 예속된 노비 포함) 1000호가 넘으면 주州를 유지하고 그렇지 못하면 주를 산이나 천이 글자로 교체하며 수령의 계급도 낮췄다.
조선 시기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양양의 호구는 857호 1,277인이었으므로 주州 글자를 교체하고 지방관의 직급(정 3품→종 6품)도 낮춰야 했으나 태조의 모친 출신지라는 연유로 태종이 대도호부로 승격시키고 양양襄陽으로 개명하였다.
중국 양양은
호북성 한강漢江 중류지역에 있는데 서한西汉 시기 양양현이 설치되었는바 이는 한강의 이름이 이 지역에서 양수襄水라고함에 기인했다. 왕망이 상양相阳이라 했다가 동한東漢 때 양양으로 회복되었다,
당唐이 양양군으로 성宋나라 시기 양양부襄阳府로 승격했다가 1912 중화민국 때 폐지되었고 1949 양번시襄樊市로 되었다가 2010 양양시襄阳市로 이름을 되찾았다.
중국 양양성과 한강
자연 인문지리
양양은 고구려와 신라의 국운을 건 전쟁터이었다. 신라 진흥왕이 함경도 지역까지 점령하자 고구려는 큰 위협을 느끼고 550~568년 동해안 지역을 되찾기 위해 대반격을 추진했다. 이 전쟁의 실체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는데 이 시기 신라의 지명 변화를 보면 전쟁의 경과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신라는 568 함경도 안변에 설치했던 비열홀주州를 폐지하고 고성에 달홀주州를 설치하는데 고구려와의 전쟁이 끝날 무렵이었다. 그리고 572년 전몰군사 위령제를 7일간 거행하는바 아마 고구려와의 싸움으로 많은 병사가 죽었음을 예상해 볼 수 있다.
65년 후 신라는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강릉에 북소경을 설치하고 고성과 양양의 회복을 도모하였던 것 같으나 오히려 658년 북소경을 폐지하고 삼척에 실직주 설치했다. 일종의 후퇴?
명분으로 양양은 말갈과 가깝고 살기가 불편함을 거론하였는데 이 시기 고구려 온달장군이 신라에 빼앗겼던 한강이북을 되찾기 위한 맹세 이야기가 있는바 이를 고려해 보면 알려져 있지 않은 무엇인가 있는 것 같다. 즉 신라의 양양에서 철수의 원인일 수고 있다.
중국 양양의 경우
한강의 중류에 위치하며 이 지역은 오랜 기간 동안 역사 경제 군사의 요지이었다, 또한 강의 수량이 풍부하고 산과 물이 빚어낸 경치가 아름다워 세상을 등지고 자연에서 인생을 꾸리는 은자들이 좋아하는 곳이었다.
당나라 시기의 시를 모아놓은 전당시집 200수 중에서 양양 관련 시가 30수나 차지한다. 명明 왕조 시기 수운의 발달로 강의 양기슭에 많은 나루터가 생겨났으며 서한西漢에서부터 시작된 단오행사는 이 시기에 절정을 이뤘다.
양양의 전략적인 중요함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전쟁이 있었는데 중원을 차지한 세력이 남방 지역을 빼앗아 통일을 도모한다던지 반대로 남쪽의 왕조가 중원에서 내려오는 세력을 결단코 막아 생존하기 위해서는 양양을 확보하여야만 했다.
이중 유명한 몇 가지 전쟁을 들면 삼국시대 촉한의 관우가 이곳을 점령하고 있는 조조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포위하고 중원방향으로 진격하려 했으나 손권의 여몽에게 일격을 당해 유비세력은 중원을 도모하는 거점을 잃게 되었고 본인도 목숨을 잃었다.
379년 전진의 부견이 황하지역을 장악한 후 장강이남의 동진세력을 꺾어 대륙을 통일하려고 양양성을 포위하여 성주城主의 항복을 받아냈으나 곧 성주의 배신으로 양양지역을 잃어 나라도 망하고 본인도 죽었다.
세 번째로 1134년 악비가 양양성을 빼앗아 남송南宋을 멸망케 하려는 금金 나라의 시도를 좌절케 하였다. 양양에서 전쟁의 압권은 몽고와 남송의 싸움이었다. 1267년 몽고가 서역의 군사까지 동원하여 남송의 영역이었던 양양을 포위하고 빼앗으려 했는데 전쟁이 매우 어려워
장장 7년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함락 후 남송은 멸망하고 몽고가 중국을 통일하였다. 1948년 공산당군이 양양의 국민당군을 힘들여 몰아내어 중원 확보에 큰 기여를 하였다.
고구려 시기 지명인 익현현翼峴縣에서 현峴은 주로 호복성의 지명에 쓰이는 한자이다. 조선 때 발간된 양양읍지의 이름도 현산지인데 이 현峴 글자도 중국 양양에 있는 현산과 같다. 고구려 시기 어떻게 현峴 글자를 사용하게 되었을까?
고려인들은 양양의 자연과 양양인들의 품성을 중국의 양양에 빗대어 이야기하였다. 아름다운 자연과 지리적 환경이 중국의 양양과 유사하여 사람들이 자연의 섭리를 믿으며 살아간다고 여겼다.
또한 풍습이 산뜻하고 아름다우며 기개가 장대하고 문헌이 찬란한 연유로 중국 양양인괴 견주어 생각하였다. 혹시 몽고 왕조 중국 양양에서 국력을 쏟은 7년 전쟁 경험과 고려와의 36년의 전쟁 영향으로 빗대어 그렇게 여겼을까?
조선시대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중국 호북성 한수漢水 연안에 아름다운 땅이 있는데, 그 지역의 이름이 양양(襄陽)이라 하였다. 조선 태종이 이와 비슷한 우리나라 땅을 양양이라 이름을 지었으며 그곳의 현산峴山도 그대로 우리 양양의 산 이름에 붙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최근 들어 양양군은 이러한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양양 지명은 우리 고유의 지명이라며 지명 사용 60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현산문화제를 양양문화제로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