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동일지명 현상 설명서 3-10)
한강은 한반도에 있는 지명 중 가장 광범위한 지역을 담고 있다. 이 지명에 내포된 역사문화는 한겨레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 이름을 사용하였을까? 그런데 중국에도 한강이 있다. 우리의 한강은 중국에 있는 한강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우리의 경우 백제인이 제일 먼저 한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는 백제인들이었을까? 현재 한강을 관리하고 있는 공공기관의 자료에 따르면 한강은 우리말 한가람에서 비롯되었는데 한은 크다 넓다 길다의 뜻이며 가람은 강의 고어라고 설명되어 있다.
한강 이름은 시대별 지역별로 다양했다. 삼국시대의 경우 고구려는 아리수 백제는 욱리하 신라는 왕봉하라고 불렀으며 고려는 열수라 했는데 큰 물줄기가 밝고 곱고 길게 뻗어 내리는 의미라고 한다. 그러다가 조선 후반부터 한강이 대세가 되어 지급에 이르고 있다.
서울 지역에서도 이름이 다양하여 3강三江으로 말할 때는 한강 용산강 서강으로 나눠 표현하였으며 옥수동 앞은 강폭이 넓어 동호東湖라고 했다. 삼국사기에는 한산하漢山河 또는 북독北瀆이라 표기하였다.
중국 한강 이름도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되었는데 한강의 발원지인 한중현 지명의 유래를 보면 그 연유를 짐작할 수 있다. 기원전 312 진秦 혜문왕이 초楚나라를 공격하여 빼앗은 땅에 한중현 설치하였는데 이 지역에 한강이 흐르고 있어 그렇게 명명하였다 한다. 이 현의 이름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중국 한강의 이름 역시 지역에 따라 다양한데 한중지역에서 한수 면현지역에서는 면수沔水 안강지역에서 창랑수沧浪水 양양에서 양강이라 한다. 또 한수汉水 한강하汉江河라는 별칭도 있다.
중국 한강과 장강
우리의 한강은 태백산에서 발원하며 514km를 흐르며 유역면적이 26천㎢로 한반도 면적의 26%에 해당하는 큰 江이다. 또한 한반도 중심에 위치하여 이 지역을 확보하면 군사 경제 사회 외교등에서 주동적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삼국시대 한강의 확보는 한반도 지배력과 나라의 흥망성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한강을 쟁탈하고자 복잡한 동맹관계도 만들어 냈는데. 5C 최강국인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한 백제와 신라의 동맹, 백제가 강해지자 6C 신라와 고구려의 밀약, 7C 신라에 대항하기 위한 고구려 백제의 결맹은 모두 한강을 차지하려는 전략에서 나온 국가 간 협력과 다툼의 표현이었다.
고려와 조선에서도 한강은 국가제정의 근간인 세곡운송의 중심역할을 하였고 한양에 거주하는 지주층의 소작료를 운반하는 교통로의 역할도 하였다. 현대에서도 한국 발전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있다.
문화적으로도 한강은 다양한 소재를 제공하였는데 12C 이규보의 작품부터 600여 편에 이른다. 또한 사랑의 연결로이기도 했는데 475년 고구려의 안장왕이 한씨녀女를 만나러 평양에서 일산으로 오자 주민들이 산에 봉화를 피워 맞이하였다 하여 고봉이라 불렀고
한씨녀女가 개백현에서 안장왕을 맞이하자 행주산성을 왕봉으로 개명하기도 한다. 이러한 역사 문화 그리고 이야기가 쌓여 한민족의 정신적 근원이 되었다.
중국 한강은 1,577㎞를 흐르는 강으로
장강의 가장 큰 지류이다, 발원은 진령산맥 남측의 섬서상 한중군 영강현宁强县이다. 한漢의 뜻은 서주西周 이전부터 하늘의 은하를 지칭되었다.
천상에는 은하가 지상은 한강이 있어 이 둘은 하늘과 땅의 대응관계라고 인식하였던 것이다. 은하는 하늘을 횡단하고 한강은 황하와 장강사이를 횡단하면서 강물의 흐르는 방향이 하늘의 은하银河와 일치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한강을 천하天河 성하星河라고도 했다.
한족의 명칭도 한강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한중지역이 왕이 된 유방은 한중왕이라 불렸고 그는 이룩한 통일왕조의 이름도 한나라이다.
한강의 위치는 황하유역과 장강유역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사천성과 강한 평원의 물자를 운반하는 통로로 유방과 제갈량의 중원 공격을 위한 전진기지로 이용되었다.
한강은 풍부한 강우와 생산물로 살기에 이상적이었으며 노자를 대표로 하는 초문화의 토양이 되어 한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인汉人들은 그들의 번영과 자부심의 상징으로 한강을 인식하였으며 이런 생각이 중원지역으로 전파되어 이 유역에 사는 사람들을 한족이라 호칭하게 되었다. 북방족北坊族은 한족의 남자를 한자漢子라고 불렀다.
백제는 한반도의 대부분을 영유한 적이 없는데 왜 이들이 불렸던 한강이름이 다른 이름들을 제치고 정착되었을까? 백제인이 한강이라 부름은 지배세력이 공식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닌 말로 일컬어진 명칭이다. 그래서 이들은 한강이름을 문자로 표현하였을 경우 한韓과 한漢을 구분하지 않았을 수 있다.
백제인들은 물길 따라 내륙 깊숙이 드나들 수 있었으며 이를 이용하여 하류 바닷가에서 생산된 소금을 상류지역 먼 내륙으로 운반하였고 기름진 한강 유역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수많은 지역으로 보내 한반도인이 삶을 누리게 하였다.
한무제가 수군을 이용하여 한반도를 침략할 때 식량등 군수물자를 물길을 잘 알고 운항실력이 뛰어난 백제계 상인으로부터 구입하였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또 대동강 유역에 있던 낙랑군이 멸망 후 한漢족 출신의 지배계층이 백제로 흘러들어 이들로부터 그들의 모국 황제인 유방과 한漢나라의 내력을 듣게 되었으며 이들은 한족임을 자랑스러워하고 한족 한나라 이름의 유래가 한강임을 듣게 되었을 수 있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들어 한漢족이 세운 명나라가 망하자 우리의 지식인과 지배층은 우리를 소중화로 여기고 중국과 일체화를 도모하려는 분위기를 조성하였으며 이때 수입된 중국의 초한지 삼국지 등 소설의 을 통해 이런 이야기가 더 넓게 확산되면서 우리의 한강을 한韓이 아닌 한강漢으로 자연스럽게 받아 받아들였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