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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밤 걷기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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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혜 Aug 25. 2024

밤 걷기

2

  아파트 단지는 세 개의 동으로 이루어졌고 그 외벽은 담쟁이넝쿨로 둘러싸여 있었다. 붉은 벽돌을 타고 빽빽하게 자라난 푸른 잎들이 가로등 빛을 받아 징그러워 보였다. 다가오던 오토바이가 정신을 차리라는 듯 클랙슨을 울리며 달려 나갔다. 도로 반대편 불 켜진 술집 앞에는 승용차가 두 대 주차되어 있었다. 울음이나 비명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계속 걸었다. 집에서 차츰 멀어지고 있었다.

  붉은 두 줄이 표시된 임신 테스트기는 여전히 내 책상 위에 놓여 있을 것이다. 성민은 침실에서 잠들었을 테고 나는 주택가 골목 입구에 자리한 어린이집 앞에서 발을 멈췄다. 평소 같았으면 별생각 없이 지나쳤을 텐데. 사십 대에 접어들면서 가임기가 지났다고 생각해 피임에 신경을 쓰지 않은 게 후회됐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사 온 지 일주일쯤 됐을 때 성민은 어린이집이 가까이에 있다고 말했다.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어도 나는 성민이 그렇게 말한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때 우리는 결혼 사 년 차였는데 이사 온 후로 다시 사 년이 지나갔다.

  결혼 전부터 나는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말했고 처음에는 성민도 내 생각을 받아들였다. 결혼 삼 년 차가 지나자 성민이 아이가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 집에 이사 올 무렵에는 강하게 나를 설득하려 했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 문제를 두고 싸우던 중에 성민은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그때 그냥 낳았어야 하는 건데.”

  임신 테스트를 하기 전에도 나는 느끼고 있었다. 몸이 평소와 같지 않다는 것을,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오래된 일이라 다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먹은 것을 나눠 먹고 내가 자는 잠을 나눠 자는 존재가 몸 안에 있다는 감각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성민과 만난 지 일 년쯤 됐을 때 나는 임신했고 임신 중단을 결정했다. 

당시 나는 광고 회사에서 이 년째 일하고 있었고 성민은 첫 번째 직장에 막 들어간 참이었다. 내가 임신 소식을 전했을 때 성민은 메시지를 읽고도 네 시간이 지나서야 나에게 전화했다. 성민은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미안해, 혜연아.”

  피임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 아이를 낳을 준비가 안 된 것, 연락이 늦은 것. 성민의 미안하다는 말은 이 모든 맥락을 포함하는 것 같았다. 피임은 나도 하지 않았고, 나 역시 임신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괜찮았다.

  수술 후 깨어났을 때 몸을 움직이려고 하자 어디선가 통증이 느껴졌다. 어딘가 비틀리는 것 같았다. 그게 배인지, 머리인지, 마음인지 콕 집어 말할 수 없었다. 그날 저녁 성민이 나를 집에 데려다주고 돌아간 뒤 혼자 미역국을 먹었다. 병원에 가기 전, 미리 만들어 둔 것이었다. 잘게 잘라 넣은 미역이 숟가락 위에서 자꾸 미끄러졌고 간을 잘못한 것인지 국물은 밍밍했다. 엄마가 끓여 주던 미역국과 아주 달랐다. 

  엄마가 만든 음식을 나는 대체로 잘 먹었다. 특히 국수를 좋아했다. 엄마가 처음 국수를 만들어 준 때는 여덟 살 겨울이었다. 당시 나는 감기에 심하게 걸려서 여러 날 아팠다. 큰 그릇에 담긴 면발을 크게 휘젓자 말간 육수에서 시원한 멸치 향이 올라왔다. 국물이 따뜻했고 얇은 면발은 부드럽게 목을 넘어갔다. 국수에는 별다른 고명이 들어가지 않은 데다 상 위에는 양념장과 김치만 올라와 있었는데도 나는 금세 그릇을 비웠다. 정말 맛있다고 했더니 며칠 뒤 엄마가 국수를 또 만들었고 나는 다시 맛있게 먹었다. 그날이었다. 엄마는 나를 가졌을 때 국수를 많이 먹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국수를 잘 먹는 거라고 덧붙였다. 엄마는 그 얘기를 딱 한 번 했지만 나는 이후에도 국수를 먹을 때면 그 말을 떠올렸다. 다른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엄마는 나를 배 속에 가진 적이 없을 텐데, 하는 생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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