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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불어오지 않았다. 여름밤을 파고드는 매미들의 울음. 그 틈으로 아파트 공동 출입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닫힌 문을 뒤로하고 발을 옮겼다. 왼손에는 쓰레기가 담긴 종량제봉투를 들고 있었다. 목련나무 두 그루를 지나자 놀이터가 나왔다. 열두 시 가까운 시각이라 사람은 없었고 고양이 한 마리가 미끄럼틀 앞에 앉아 있었다. 가로등에 비친 털이 갈색으로 보였다. 내가 다가가도 그르렁거릴 뿐 고양이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나는 빠르게 고개를 돌리고 놀이터와 맞붙은 분리수거 구역으로 들어갔다.
쓰레기를 종류별로 나눠 담을 수 있도록 포대가 늘어서 있었고, 포대에 들어가지 않는 대형 스티로폼과 종이 상자들은 바깥에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쓰레기로 꽉 찬 종량제봉투들이 일반 쓰레기 수거함 안에 가득했다. 뚜껑이 조금 열린 음식물 쓰레기통에서는 시큼한 냄새가 풍겼다. 나도 모르게 헛구역질을 했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올 때 종종 겪는 상황인데도 유독 비위가 상했다.
이번 주는 성민이 쓰레기를 버리기로 되어 있었다. 친구들 남편과 비교해 보면 성민은 가사 분담에 적극적인 편이었다. 야근하고 늦게 들어온 날에도 자기가 맡은 일은 꼭 챙겨서 해 두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저녁을 먹는 내내 뉴스를 보면서 저럴 수는 없다고 큰 소리로 한탄했다. 식사 후 자리를 정리하고 나서도 성민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 사람을 저렇게 죽일 수가 있어. 더군다나 민간인을.”
전쟁이 또 시작되었다. 뉴스에서는 폭탄이 터지고 건물들이 화염에 휩싸이는 장면을 보여 줬다. 비명과 울음이 화면 밖으로 들려오는 것 같아서 나는 두 손으로 배를 감쌌다. 성민은 뉴스가 끝난 뒤에도 후속 기사를 찾아 읽는 데 열을 올리더니 쓰레기를 버리는 것은 잊고 잠들었다.
쓰레기야 하루쯤 버리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명치끝이 막힌 듯 속이 답답하고 마음이 어수선해 바람을 쐴 생각으로 내가 들고 나왔다. 종량제봉투를 수거함에 넣었다. 빈손을 털며 무심코 발을 옮겼다가 옆에 쌓여 있던 종이 상자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급하게 중심을 잡았다. 날카로운 종이 끝이 피부를 스쳐 화끈거렸다. 몸을 숙이고 살펴보니 종아리에 붉은 자국이 생겼다. 비뚤게 빠져나온 폐지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몸을 일으키고 또 조심해야 할 게 있는지 주변을 살펴보았을 때,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전쟁 중에 다리를 잃은 뒤 변변한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폐지를 주워 생활했다는 사람의 이야기였다.
미끄럼틀 쪽으로 걸어갔다. 여전히 거기 앉아 있던 고양이가 고개를 들고 나를 향해 사납게 울었다. 그 울음에 섞여 비명이 들려왔다. 비명은 고양이가 낸 게 아니었고 내 뒤편 먼 곳에서 난 소리 같았다. 소리가 들린 방향을 두리번거렸다. 고양이가 다시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이를 드러냈다. 그건 마치 여기서 나가라는 신호처럼 여겨졌다. 나는 뒤돌아 앞을 향해 걸었다. 점점 더 큰 보폭으로 단지 내 주차장을 가로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