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호] 얼굴
몇 년 전, 대학동기 단톡방에 올라온 기사에는 동기 중 한 명의 얼굴이 환하게 찍혀있었다. 핑계지만 사는 게 바빠 종종 얼굴을 떠올리다가도 금세 다른 일로 또 잊혀지던 친구. 그 친구와 나는 때때로 술잔을 기울이며 밤이슬을 맞을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친구는 다른 지역의 학교로 편입하고 나 역시 취업 준비로 몇 년간 영 소식이 뜸해졌다.
어디에서든 그럭저럭 잘 살고 있는 줄만 알았는데 몇 년 만의 첫 소식은… 실명失明이었다. 곧 핸드폰을 들었지만 혹시 내 연락이 더 상처를 주진 않을까, 본인 입으로 직접 듣지 않은 근황을 함부로 입에 담아도 되나 여러 가지 생각으로 복잡했다. 다시 들여다 본 기사 속 사진에는 말갛게 웃는 모습이 여전히 예쁜, 내가 기억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여전히 저장된 연락처를 두고 망설이기만 하다 걸려온 전화로 설지 않은 목소리가 귀에 걸렸다.
- 기자야. 나야, 정원이. 잘 지내지?
세상에. 정원아, 너 이제 괜찮아 진거야? 내가 소식 전해 듣고 얼마나 놀랬는지 몰라. 전화는 얼마나 하고 싶었다고. 그래, 그럴 리 없다고 나 생각했잖아.
라는 말이 입술 끝에까지 걸린 순간,
- 기자야,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니?
벌린 입술을 곧 닫았다. 그녀는 작업장 내 사용되던 화학약품으로 시신경이 녹아서 이식 수술도 불가능한, 완전 실명 상태라고 했다. 오랜만의 연락은 반갑고도 슬펐다. 나는 네게 뭐라고 해야 할까. 내가 해야 할 말은 위로일까, 아니면 작업장에 대한 분노일까. 그도 아니면 이렇게라도 연락이 되어서 반갑다일까… 해야 할 말을 찾지 못해 횡설수설하는 나에게 친구는 연락이 되어서 반갑다고, 근처 병원에 입원해 있으니 조만간 보자는 말을 하고 끊었다. 다음날 부리나케 병실에서 만난 정원이는 말간 얼굴에 속눈썹은 유난히 길어 그윽한 눈에 담긴 다정함까지 마지막으로 봤을 때 얼굴 그대로였다. 직접 보고서도 내 눈을 의심했다. 너는 이렇게나 그대로인데 앞으로 영영 볼 수 없다니.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만 수백 번 했건만 친구의 얼굴이 일렁일렁거렸다.
- 기자야, 너는 목소리가 그대로다. 얼굴도 그대로겠지, 그럴 것 같아.
세월로 내 얼굴은 꽤나 달라졌지만 친구 기억 속에는 나는 여전히 이십 대 초반 싱그러운 모습 그대로이리라. 하지만 여고생 같은 단발머리에 꽂아 넣은 핀까지. 눈이 보이지 않아서 생긴 에피소드를 농담을 섞으며 말하는 그녀는 얼굴도, 이십대의 천진함마저 그대로였다. 바뀐 것은, 실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야기 동무가 되는 것뿐이라 한 달에 두세 번씩은 꼭꼭 갔는데 눈이 보이지 않아도 그녀는 매번 말끔한 얼굴에 동그란 눈은 언제나 반짝반짝 빛이 났다. 시신경을 재생시키는 의술도 언젠가는 발명될 것이라며 희망을 노래하는 그녀를 보다보면 때때로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깜박할 정도로 친구의 얼굴에는 조금의 구김도 없었다.
그러던 중 나는 아이의 진학으로 바빠졌고, 그녀는 퇴원하여 본가로 돌아가며 가끔 전화만 주고받다 또다시 연락은 뜸해졌다. 드라마에는 늘 그릇이 깨지면서 주인공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다는 암시를 주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살다보면 운명이란 누군가를 괴롭히려고 작정하기 보다는, 그저 그 무엇도 고려하지 않고 흘러간다는 느낌이 든다. 그 어떤 암시도, 예고도 없이 가혹하게. SNS 알고리즘이 무심하게 던져놓은 그녀의 부고에 나는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뇌졸중이었다. 화학약품은 그녀의 시신경뿐만 아니라, 뇌까지 손을 뻗쳤나 보다. 부정도 할 수 없게 환한 얼굴을 담은 영정 사진이 또렷이 담겨 있었다. 피해보상 시위와 치료를 위해 서울로 올라간다는 소식이 친구의 마지막이었다. 이 일만 마무리되면, 이것만 손에서 떠나면 핑계를 대며 차일피일 만나러 가는 것을 미루던 나는 죄책감으로 기사를 차마 다 읽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마지막 소식을 들은 후로 삼 년이 지났다. 우리가 안 지는 이십 년이 지났다. 나는 너를 생각하면 병실에서의 마지막 얼굴보다, 학교 안 벚나무 아래 봄비처럼 흩날리던 벚꽃 잎 사이에 서 있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른다. 너는 영원히 내 기억 속에서 싱그럽고 앳된 얼굴 그대로일 것이다. 내가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도 너는 내게 영원히 스무 살이다. 나는 이제 네 얼굴을 떠올릴 때 괴로워만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나 밝게 웃던 네 얼굴을 죄책감 때문에 지우려는 것이 너를 가장 비겁하게 기억하는 방식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면서 오랜만에 너의 얼굴을 다시 떠올린다. 그리고 네가 나를 나의 가장 빛났던 얼굴로 기억하듯이, 나 역시 네가 가장 빛났던 얼굴로 기억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