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비임비의 소소한 대화
임비 나 이 시 좋아해. 그런데 시낭송 하자는 건 아닐테고.
곰비 맞아. 나도 이 시 좋아하거든. 백석 시는 다 좋은데, 이 시는 더 좋아. 무엇보다 제목과 처음 단 두 행으로만 드러내는 긴 서사에 전율이 일 정도야.
하지만 오늘은 시가 아니라, 이 제목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아서 가져 온 거야. 이 시는 일제 강점기 때 씌여진 시지만, 우리 부모님 때도 이런 방식의 주소를 썼다고 하더라고. 집집마다 대문에 주인의 문패가 걸려있고.
임비 이런 방식의 주소라니?
곰비 ‘~ 방’이라고 쓰는 거 말이야. 백석은 박시봉이란 주인의 집에 세들어 살고 있는 거잖아. 나는 자가에 살지 못하고, 세들어 살고 있다고 만천하에 드러내는 방식이지. 지금이라면 인권침해니 사생활침해니 하면서 기함할 방식이잖아.
임비 듣고 보니 그러네. 요즘은 단독주택에 세들어 살더라도 주소를 이렇게 쓰지는 않지. 게다가 문패? 아이고, 지금은 생각도 못하지.
심지어 가난한 달동네 이미지 때문에 아예 동이름을 바꾼 곳도 있었잖아. 그나마 주소를 거리 이름으로 바꾸면서 동 이름은 물론 아파트 이름까지 쓰지 않아도 됐고.
곰비 맞아. 주소표기 방식을 바꾼 의도가 빈부격차 감추기가 아니었을지라도, 동 이름과 아파트 이름만으로도 빈부가 드러났으니까.
근데 불과 3, 40년 전 주소에는 내가 셋방에 살고 있다는 것까지 다 드러내야 했잖아.
그리고 이런 것에 문제의식도 없었고, 따라서 인권침해니 사생활침해니 하는 것도 생각하지 않았어.
임비 모두 가난했으니까 그런 거 아냐? 드라마 보면 그때는 마당을 가운데 두고, 방 한 두 칸씩 세들어 살면서 누구네 집이 밥을 굶고 있는지, 누구네 집이 얼마나 자주 부부 싸움을 하는지, 저 집 자식은 공부를 얼마나 하는지, 심지어 화장실도 같이 썼으니까. 먹고, 싸는 일까지 서로 환히 알 정도였잖아. 모두들 그렇게 살았으니까 당연한 일로 여긴 거지.
곰비 그러니까. 그땐 당연했는데 지금은 왜 기겁을 하고, 화를 내고, 참을 수 없는 일이 되었느냐는 거지. 이제 모두들 살만해졌으니까? 주거구조가 아파트로 변해서? 하숙이란 말 대신 원룸에 사는 시대니까?
임비 당연하지. 옛날에는 주거 양식도 다르고, 공동체 의식도 살아있던 시대잖아. 다들 가난하고, 집을 가진 사람보다 세를 사는 사람이 많은데 부끄럽다기 보다는 ‘다 그렇게 살아’ 하면서 살았으니까. 그렇게 살던 시댄데, 거기에 문제의식을 가질 일이 뭐가 있었겠어.
곰비 그러니까. 그렇다고 그때의 사람과 지금의 사람이 다른 사람인가? 그때도 밥 굶는 것, 코트 하나 없이 추위를 견디는 것이 부끄러웠을텐데. 또 누군가는 세를 사는 걸 들키기 싫었을텐데.
임비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은 뭐야? 옛날 사람들이 문제의식 없이 살았다고 비난하는 거야?
곰비 무슨 비난. 언어의 문제를 말하고 싶었어.
박시봉방이란 주소를 쓸 때는 인권이나 사생활침해란 말이 없었거나 담론화 되지 않았어.
말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생각할 수도 없었다고. 생각해 보면, 정말 오래 전도 아닌데 말이야.
임비 아, 그거 교양과목 시간에 배웠는데, 정확하게 생각은 안 나네. 언어와 사고의 관계 뭐 이런 거였던 거 같은데.
하, 이제 생각났어. 조지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신어Newspeak. 신어가 인간의 사고를 지배한다고 하잖아. ‘무지는 힘’이라는 구호가 아직도 생각나네. 와, 그때 그 소설 읽으면서 소름이 돋았는데. 딱 그거네.
곰비 맞아. 바로 그거야. 말이 권력이고, 사람들이 무얼 생각해야 하는지까지 결정하잖아.
아마 인권이나 사생할 침해 역시 소수의 누군가가 거기에 문제의식을 느꼈겠지. 그리고 그 문제에 이름을 만들었고, 그 말에 모두들 공감하고, 확산되면서 우리 모두의 사고가 재구성되고 담론화된 거지.
임비 그래. 언어가 사고를 재조직하지.
그런 의미에서 조지오웰의 1984에서 나온 빅브라더도 놀랍지만, 신어라는 말을 그렇게 생각해낸 것도 정말 대단하잖아.
곰비. 문제는 지금은 담론화 되는 것을 넘어 너무 정교해졌다는 거야. 그래서 모두들 너무 예민하고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고 있잖아. 까딱하면 사생활 침해고, 인권 침해라면서 보호막을 치는데, 정작 자기가 남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에는 무감각하고. 오로지 자기 인권에만 집착하는데 더 열을 올리는 거 같아.
난 백석 선생의 시를 좋아해서 가끔 시집을 꺼내보거든. 근데 이번에는 이 시를 보면서 인권이란 말이 없던 시대와 지금처럼 스치는 바람에도 파르르 떨면서 자신의 인권이나 사생활 침해만 주장하느라고 상대방 얼굴에 침이 튀는지도 모를 정도로 열을 내는 시대, 어느 때가 더 행복할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
임비 그래, 그렇지. 하지만 좋아하는 백석 선생의 시를 보면서 언어와 사고를 끄집어 낸 건 불만이야.
박시봉방이 자꾸 다른 의미로 읽힐 거 같단 말이지.
곰비 그러게. 생각의 오지랖하고는.
우리는 인권이나 사생활침해라는 단어가 만들어지기 전으로 절대 돌아갈 수는 없잖아. 모른 체 겪었던 부당함, 부끄러움을 우린 겪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만 신경질적으로 예민한 인권이나 사생활 침해 논란 앞에서 우리의 관심과 배려, 심지어 교육까지 모두 그 앞에서 멈추고 말 것 같아서 걱정이야.
사랑이 집착이 되듯이 예민한 인권과 사생활 침해 앞이 아름다운 인간관계의 무덤이 되고, 사막이 되는 날이 올까봐 겁이 나거든.
임비 설마 교육까지?
곰비 그래. 이미 뉴스에서 많이 봤잖아. 다른 아이 학습권이나 교사의 교육권은 나 몰라라 하면서 자신의 아이 인권만 소중하다면서 선생님에게 소송 거는 학부모들.
사실은 신경질적으로 예민한 인권주의자 학부모들이 제일 무섭기도 해. 교육의 밑바닥을 흔들고, 아이들이 올바른 인간으로 성장하는 데 걸림돌이 되니까.
임비 맞아, 맞아. 교육현장에도 그런 일이 많았지.
에휴, 솔직히 말하면, 그들이 말하는 것은 인권이 아니지 않나. 인권으로 포장된 공격용 무기일 뿐이지. 난 그런 사람들을 이렇게 불러.
곰비 네 표정 보니까 엄청 심한 말 나올 거 같아. 임비야, 과유불급이란 말은 늘 옳아. 그러니 수위조절 해라.
임비 그래도 할 건 해야지. 난 그들을 이렇게 불러. 인, 권, 충.
곰비 인권충? 너 새로운 언어를 만든 거야? 그 예민한 사람들을 위해? 너, 곧 테러당하는 거 아닐까.
임비 아니, 당연하게도 그들은 자신을 지칭하는 말인지 몰라.
난 그저 인권이 인권다워지는 세상을 위해 이 신어新語를 만들었을 뿐이야. 그래야 글로벌 원룸텔 301호에 살면서도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제대로 읽을 수 있으니까.
곰비. 그럼 세스코에 연락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