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비임비의 소소한 대화
난 이 말을 썩 좋아하지는 않아. 불행이면 불행이고, 다행이면 다행이지, 불행중 다행은 뭐야.
그래. 불행중 다행이란 말이 애매하긴 해.
애매하기만 해? 너 다리 하나 부러진 게 얼마나 다행이냐. 아니면 두 다리 몽땅 부러졌을지도 모르는데, 이런 거잖아. 아예 다리 하나도 안부러졌어야 다행인 거지. 이건 뭐, 눈 가리고 아옹하는 위로 같아서 썩 유쾌하지 않아.
그래. 눈 가리고 아옹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 하지만 난 문득 이 말이 틈바구니에 핀 꽃 같단 생각이 들었거든. 우리가 자주 보는 것 말이야, 벽이나 길바닥 틈바구니를 비집고 기어이 핀 꽃.
칫. 그렇게 미화하지 마. 어쨌든 불행한 일이 먼저 일어난 거잖아. 근데 더 큰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하는 거고.
난 이 말이 불행과 일상의 틈바구니에서 건져 올린 멋진 말이라고 생각하거든. 아마 이 말이 없었다면 일어난 불행은 불행한 일로 끝났을 거야. 하지만 똑같은 일이 불행중 다행이라고 규정되면서, 더는 불행이 아닌거야. 심지어 일상이 아닌, 다행으로 변하는 마법까지 부린거잖아
불행의 늪에 빠지고 싶지 않은 안쓰러운 몸부림이지.
그러니까 애절하고 안쓰러운 말이지만, 불행중 다행이란 말로 희망의 변주가 되지 않았다면 지독한 상실감으로 불행의 늪에 빠졌을 수도 있잖아.
너 지금 나한테 일어나는 일에 대해 위로하려고 꺼낸 말인 거 알겠는데, 위로가 안돼. 어떻게 내가 한 일도 아닌 일 때문에 내가 제일 싫어하는 부서로 발령나냐고. 그런데 넌 곧 밝혀질 일에 엮인 게 얼마나 다행이냐고, 빼도 박도 못할 일에 연루되지 않은 게 그나마 불행중 다행이라고 하잖아. 난 그냥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짜증 그 자체야.
에헤, 짜증내지 말라니까. 한 수 더 떠볼까. 오히려 그 일이 전화위복도 되고, 오히려 좋아도 될 수 있다니까.
불행이란 틈바구니에서 아주 작은 다행을 찾아 이름을 불러주면, 김춘수 선생의 시처럼 내게 와 꽃이 되기도 한다니까. 틈바구니에서 간신히 숨을 쉬는 약한 존재들이 이 세상엔 너무 많잖아. 그들에게 다행이란 이름을 붙여주면 그 작은 존재들이 빛이 난다니까.
온통 불행만 있어 앞이 캄캄한 것 같아도 잘 보면 반드시 틈바구니가 있어. 내가 불행하다 생각될 때, 힘들 때, 앞이 안 보일 때 틈바구니를 잘 살펴보라고. 그럼 거기에 불행중 다행이란 작은 빛이 보일테니까. 그건 자기 눈으로 찾아야 돼. 남의 눈으로 찾으면 짜증이고, 가증스런 위로가 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