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9장
우리는 그동안 잠언 1장부터 8장까지 이어지는, 아비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들려주는 진솔하고도 장엄한 지혜의 여정을 함께 걸어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잠언 9장은 솔로몬 왕이 자신의 지난 시절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장차 나라의 지도자가 될 젊은이에게 들려준 서론격인 잠언들의 찬란한 절정이자 위대한 결론입니다.
1장부터 이어져 온 긴 서론의 막을 내리고, 10장부터 본격적으로 펼쳐질 개별적인 삶의 지혜들을 다루기에 앞서, 솔로몬은 우리 인생 전체를 좌우할 가장 거대하고도 본질적인 선택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잠언 9장은 우리 인생을 향해 외치는 두 가지의 뚜렷한 음성, 즉 '지혜(Lady Wisdom)'와 '미련함(Woman Folly)'이라는 두 여인을 극적으로 의인화하여 우리의 결단을 묻고 있습니다 .
이 두 여인은 각자의 집을 짓고, 각자의 식탁을 차린 뒤, 성읍의 가장 높은 곳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경쟁적으로 목소리를 높여 초대장을 던집니다.
현대 사회, 특히 시드니와 같이 바쁘고 분주하게 돌아가는 거대한 도시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두 여인의 초대는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순간부터 다시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들려옵니다.
아침 일찍 트레인을 타고 시티로 출근하는 길에서, 리드콤의 바쁜 상점가에서 일하는 동안, 그리고 늦은 밤 지친 몸을 이끌고 엠포(M4) 고속도로를 달려 집으로 돌아오는 그 모든 순간 속에서도 우리는 영적인 갈림길에 섭니다.
지혜와 어리석음이 치열하게 사람을 부르고 있는 이 영적 전쟁터에서, 우리는 과연 누구의 초대에 응하여 어느 식탁에 앉아 무엇을 먹고 마실 것인가를 매일매일 결단해야만 합니다.
오늘 우리는 학문적인 성경 해석의 탄탄한 기초와 고대 근동의 역사적 배경, 그리고 성경 원어(히브리어)의 깊은 의미를 바탕으로 이 9장의 말씀을 해부해 볼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차가운 신학적 지식에 머물지 않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팍팍한 가슴에 닿는 따뜻하고 친밀한 언어로,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메시지로 이 귀한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책을 들고 예배당에 앉아 있을지라도, 그 말씀을 나의 구체적인 삶에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는다면 우리 영혼에는 필연적으로 말씀의 기근이 찾아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두 여인이 준비한 각기 다른 두 개의 연회장으로 발걸음을 옮겨 보겠습니다.
잠언 9장의 첫 번째 단락은 '지혜'가 우리를 위해 얼마나 놀랍고 풍성한 잔치를 준비했는지를 대단히 생생하고 역동적인 필치로 그려냅니다. 먼저 본문의 말씀을 한 절 한 절 마음 깊이 새기며 읽어보겠습니다.
1 지혜가 그의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
2 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고
3 자기의 여종을 보내어 성중 높은 곳에서 불러 이르기를
4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5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고
6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 하느니라
가장 먼저 1절을 보면, 지혜가 자신을 초청할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는 장엄한 모습이 등장합니다. 원어인 히브리어로 여기서 사용된 '지혜'는 '호크모트(חָכְמוֹת)'라는 단어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단어가 여성 복수형이라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복수형은 단순히 숫자가 많다는 뜻을 넘어, 대상의 크기나 위엄이 압도적일 때 사용하는 '장엄의 복수(Plural of Majesty)' 혹은 '강조의 복수'입니다.
즉, 여기서 초대하는 지혜는 세상의 얄팍한 처세술이나 파편화된 잡학 지식이 아니라, '모든 지혜 중의 으뜸가는 지혜', '가장 탁월하고 완전한 신적 지혜'를 의미합니다.
이 완벽한 지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의 집을 짓고 일곱 기둥(Seven pillars)을 다듬는 것"이었습니다.
고대 근동(Ancient Near East)의 건축 문화와 문헌들을 살펴보면 이 표현이 얼마나 엄청난 스케일을 자랑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고고학자들이 이스라엘의 메기도(Megiddo), 라기스(Lachish), 사마리아 등의 고대 유적을 발굴했을 때, 다수의 기둥이 세워진 넓은 저택은 오직 왕족이나 막대한 부를 가진 최고위층 귀족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웅장한 구조물이었습니다.
아랍의 오래된 격언 중에 "부자의 집은 열두 기둥 위에 서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좁고 제한된 성읍 내에서, 일곱 개의 육중한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집은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대저택이자, 어떤 폭풍우에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 가장 안전하고 완벽한 피난처를 상징합니다.
성경에서 '일곱(7)'이라는 숫자는 항상 완전함과 충만함을 상징합니다. 역사적으로 초대 교회의 교부들과 신학자들은 이 '일곱 기둥'을 향해 다양한 영적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를 든든히 떠받치는 사도들과 사역자들로, 어떤 이들은 교회의 일곱 가지 성례로, 또 어떤 이들은 이사야 11장에 등장하는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지혜와 총명, 모략과 재능,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 등)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해석을 취하든 본질적인 의미는 동일합니다. 지혜가 우리를 위해 예비한 집은 결코 부실공사로 지어진 위태로운 판잣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안전하고, 가장 완전하며, 우리의 모든 것을 품어줄 수 있는 영원하고 견고한 생명의 안식처입니다.
지혜의 헌신은 집을 짓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녀는 직접 "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춥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가부장적 농경 사회에서 짐승을 도축하는 일은 엄청난 체력과 기술을 요하는, 전통적으로 건장한 남자들의 거친 노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의인화된 여성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먹이기 위해 이 피 튀기고 수고로운 희생의 과정, 그 어렵고 책임감 무거운 육체적 노동을 기꺼이 감당합니다.
또한 '포도주를 혼합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고대의 연회에서는 귀한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기 위해 값비싼 향신료를 포도주에 섞어 풍미를 극대화하거나, 알코올이 사람의 이성을 잃게 하지 않도록 적절한 비율로 맑은 물을 섞어 가장 마시기 좋고 완벽한 상태의 음료로 준비했습니다.
즉, 이 잔치는 대충 배달 음식을 시켜서 차려낸 상이 아닙니다. 손님의 입맛과 건강, 그리고 영적인 유익까지 철저하게 배려하여 정성껏 차려낸 최고급 로얄 뱅큇(Royal Banquet)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할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정육점에 가서 가장 좋은 고기를 고르고, 채소를 씻어 다듬고, 불 앞에서 몇 시간씩 요리를 하며, 집안 구석구석을 땀 흘려 청소합니다. 그 과정은 분명 육체적으로 고단하지만, 초대받은 이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환하게 웃으며 맛있게 음식을 먹을 때 느끼는 그 벅찬 기쁨 하나로 모든 수고를 잊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도 정확히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굶주리고 지쳐 쓰러져가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지혜가 짐승을 잡고 포도주를 부어 식탁을 예비했듯, 예수님께서는 친히 십자가라는 제단 위에서 당신의 살을 찢으시고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우리를 위한 영원하고 완전한 구원의 식탁을 준비하셨습니다.
잔치 준비를 마친 지혜는 3절에서 "자기의 여종을 보내어 성중 높은 곳에서 불러"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당시 이집트의 '아메네모페의 지혜(Instruction of Amenemope)'나 우가릿 문헌 등에 등장하는 고대 이방 종교의 연회들은 주로 은밀한 신전의 밀실이나 폐쇄적인 특권층만을 위한 배타적인 의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지혜는 다릅니다. 지혜는 뒷골목의 음침한 곳에서 속삭이거나 특정 엘리트만을 은밀히 부르지 않습니다. 도심의 가장 번화하고 개방된 곳, '성중 높은 곳'에서 누구나 들을 수 있도록 당당하고 투명하게 외칩니다.
그녀의 주된 초청 대상은 누구입니까? 4절은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이라고 말합니다. 원어 성경을 보면 이 '어리석은 자'는 히브리어로 '페티(פֶּ֫תִי)'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아직 악에 완전히 찌들거나 고의적으로 반역하는 악인은 아니지만, 선과 악을 분별할 기준이 없어서 유혹의 바람이 불면 이리저리 쉽게 휩쓸리는 '순진하고 줏대 없는 사람, 마음이 활짝 열려 있어 아무거나 주워 삼키는 미숙한 자'를 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페티'가 바로 저와 여러분의 본래 모습 아닙니까? 세상의 화려한 소셜 미디어와 유튜브 알고리즘이 던져주는 자극적인 메시지에 귀가 얇아져 이리저리 흔들리고, 영적 분별력이 부족하여 무엇이 진짜 내 영혼을 살리는 길인지 모른 채 방황하는 우리의 영적 민낯입니다.
그러나 지혜는 우리의 이러한 미숙함과 자격 없음을 책망하기에 앞서, 조건 없는 은혜의 식탁으로 우리를 부릅니다.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고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5-6절). 이 얼마나 눈물겨운 사랑의 외침입니까? 이 말씀은 신약 시대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입술을 통해 완벽하게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6:35). 십자가의 복음은 그저 지적 호기심을 채우는 철학적 관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뚫고 들어와 죽었던 자를 살려내는 능력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심으로 영원한 생명(Zoe)을 얻게 하는 피 묻은 생명의 양식입니다.
아래 표는 고대 사회의 일반적인 연회와 잠언 9장이 보여주는 지혜의 연회가 어떻게 본질적으로 다른지를 요약해 줍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지혜가 베푸는 은혜의 탁월함을 다시 한번 깊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식탁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향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지혜의 식탁 앞에는 언제나 인간의 반응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솔로몬은 지혜의 초청(1-6절)과 미련한 여인의 초청(13-18절) 사이에 위치한 이 중간 단락에서, 진리의 말씀을 대하는 인간의 두 가지 대조적인 태도를 아주 예리하고 적나라한 해부학자의 시선으로 드러냅니다.
7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이 잡히느니라
8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9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
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11 나 지혜로 말미암아 네 날이 많아질 것이요 네 생명의 해가 네게 더하리라
12 네가 만일 지혜로우면 그 지혜가 네게 유익할 것이나 네가 만일 거만하면 너 홀로 해를 당하리라
7-8절에 거듭 등장하는 '거만한 자(scoffer, mocker)'의 본질을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어 원어로는 '레츠(לֵץ)'라고 합니다.
앞서 4절에 등장했던 '어리석은 자(페티)'가 아직 선악을 모르는 철없는 아이와 같다면, 이 '거만한 자(레츠)'는 영적 질병이 훨씬 더 깊어지고 악화되어 이제는 스스로를 구제 불능의 상태로 몰아넣은 사람입니다.
그는 마음이 굳은살처럼 딱딱해져서 진리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진리를 전하는 자를 비웃고 조롱하는 교만한 인물입니다.
거만한 자의 가장 치명적인 특징은 '책망'을 받을 때 드러납니다. 누군가 사랑과 애정의 마음으로 그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영적인 교훈을 줄 때, 그는 즉각적으로 날 선 방어기제를 펴며 반격합니다.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8절). 자존심이 우상이 된 이 사람은,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도리어 책망하는 자를 향해 "너나 잘하세요", "당신이 뭔데 나를 가르치려 들어?"라며 인신공격과 모욕으로 상처를 줍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이런 일들은 너무나 자주 일어납니다. 재미있지만 뼈 있는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아주 절친한 친구가 함께 식사를 마쳤는데, 그의 이빨 사이에 아주 크고 새파란 시금치 조각이 선명하게 끼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진정으로 그 친구를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에게 망신을 당하기 전에 조용히 화장실로 데려가서 "친구야, 거울 좀 봐. 이빨에 뭐가 꼈어"라고 말해줄 것입니다.
이때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지혜롭고 건강한 자존감을 가진 친구라면 얼굴이 잠시 붉어지더라도 "아이고, 창피해라! 미리 말해줘서 정말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종일 이러고 다닐 뻔했네"라며 거울을 보고 이빨을 닦아낼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하고 '거만한 자'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도리어 불같이 화를 내며 소리를 지릅니다. "야! 내 이빨에 신경 끄고 네 옷에 묻은 얼룩이나 신경 써! 네가 완벽해? 왜 남의 사생활에 간섭하고 난리야!"라며 진실을 말해준 친구를 공격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은 마치 거울과 같아서, 우리의 영적 이빨에 깊이 끼어 있는 추악한 죄악과 위선, 내면의 허물들을 가차 없이 비추어줍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내 가슴을 찌르고 나의 숨기고 싶은 죄를 들추어낼 때,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고 계십니까? 내 자존심이 상한다고 목회자의 설교를 불쾌하게 여기며 방어벽을 칩니까, 아니면 나를 고치고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의 메스 앞에 눈물로 무릎을 꿇으십니까?.
반면, 참된 지혜자('하캄' חָכָם)의 태도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요"(8-9절).
참된 지혜는 자신이 이미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착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한계와 죄성을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기에, 늘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진리를 배우고자 하는 영적 스펀지와도 같습니다.
진정으로 성숙한 성도는 영혼을 찌르는 책망의 말씀이 들려올 때, 그것을 나를 파괴하려는 정죄가 아니라 나를 빚어 가시는 토기장이의 손길로 받아들입니다. 아픈 주사를 놓지만 병을 고쳐주는 영적 의사이신 예수님의 손길을 온전히 신뢰하며 사랑하는 자입니다.
말씀의 거울 앞에 선 이 두 부류의 특징을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0절에서, 잠언 1장부터 9장까지의 대단원을 장식하며 구약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대주제가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찬란하게 선포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경외(Fear of the LORD, 히브리어 이라 יִרְאָה)'란 하나님을 마치 독재자나 무서운 경찰관처럼 여겨 벌벌 떠는 공포심(terror)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압도적으로 거룩하고 무한하게 위대하신 분인지를 깊이 깨닫고, 그분의 존전 앞에서 스스로 옷깃을 여미며 엎드리는 '사랑과 존경이 바탕이 된 거룩한 두려움(affectionate reverence)'입니다.
세계적인 기독교 변증가이자 문학가인 C.S. 루이스는 그의 명작 『나니아 연대기』에서 절대자 예수님을 상징하는 거대한 사자 '아슬란'에 대해 아주 탁월하게 묘사했습니다. 주인공 아이들이 아슬란을 처음 만나러 갈 때, 아슬란이 사자라는 사실을 듣고 "그분은 안전한 분인가요?"라고 묻습니다.
그때 안내자였던 비버 부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안전하다고요? 누가 안전하다고 했습니까? 물론 그분은 안전한 분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분은 선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바로 왕이시니까요!(He is good but he isn't safe.)".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상처를 싸매어 주시는 다정하고 따뜻한 아버지이시지만, 동시에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악을 멸하시는 소멸하는 불이십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사람만이, 비로소 세상의 권력이나 사람들의 평가,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좁은 길을 가면서도 결코 외롭지 않으며, 사람들이 종교적 광신도라고 비웃고 고지식하다고 손가락질할지라도, 묵묵히 말씀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강력한 내면의 힘을 얻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진짜 지혜의 파워입니다.
머리로 성경 구절을 암송하고 신학적 교리를 유창하게 설명하는 것은 지식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일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가정에서의 부부 싸움의 순간, 직장에서 부정한 이익을 얻을 기회 앞, 남을 험담하고 싶은 충동 앞—에서, 불꽃 같은 눈동자로 나를 감찰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식하며 나의 본성을 꺾고 올바른 결단을 내리는 것. 그것이 바로 생명을 살리는 명철입니다.
이 지혜를 선택한 자에게는 생명의 해가 더해지는 유익이 주어집니다(11-12절). 지혜가 주는 축복은 단순히 이 땅에서 무병장수하고 부자가 된다는 기복적인 약속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깊고 친밀한 연합을 통하여 매 순간 하늘의 평안을 누리며, 궁극적으로 영원한 생명(영생)을 소유하게 된다는 찬란한 약속입니다.
지혜를 선택할 때 그 유익은 오롯이 나의 영혼과 내 가정을 살리지만, 교만하여 지혜를 거부하면 "너 홀로 해를 당하는" 철저한 고독과 파멸을 맞이하게 될 것임을 성경은 엄중히 경고합니다.
이제 장면은 마치 연극의 무대가 전환되듯 완전히 뒤바뀌어, 지혜의 완벽한 대척점에 서 있는 또 다른 여인, 바로 '미련한 여인(Woman Folly)'을 조명합니다.
원어 성경은 그녀를 '에쉐트 케실루트(אֵשֶׁת כְּסִילוּת)'라고 부릅니다. 그녀가 던지는 초대의 메시지는 겉보기에 지혜의 초대(1-6절)와 매우 유사하게 들리지만, 그 내면의 본질과 최종적인 결말은 지옥과 천국만큼이나 판이하게 다릅니다.
13 미련한 여인이 떠들며 어리석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14 자기 집 문에 앉으며 성읍 높은 곳에 있는 자리에 앉아서
15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인들을 불러 이르되
16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17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
18 오직 그 어리석은 자는 죽은 자들이 거기 있는 것과 그의 객들이 스올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13-14절을 통해 묘사되는 미련한 여인의 캐릭터는 명확하고도 강렬합니다. 그녀는 시끄럽고, 무지하며, 극도로 뻔뻔합니다. 1절에서 보았던 지혜의 여인은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일곱 기둥을 깎고 고기를 잡으며 구슬땀을 흘렸습니다.
지혜는 수고로운 노동을 기쁨으로 감당했습니다. 반면, 이 어리석은 여인은 어떠한 땀도, 수고도, 희생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편안하게 "자기 집 문과 성읍 높은 곳에 거만하게 앉아서" 사람들을 부를 뿐입니다.
그녀가 앉아 있는 '성읍 높은 곳'은 본래 올바른 통치자나 참된 지혜자만이 앉아야 할 권위와 명예의 자리입니다. 거짓된 어리석음은 언제나 정당한 권위를 찬탈하여 자신이 마치 진리인 양 교묘하게 위장합니다. 이 여인의 가장 큰 무기는 바로 '소음(loudness)'입니다.
진정한 실력이 없고 속이 텅 빈 수레일수록 더 큰 소리를 내듯, 자신이 내세울 참된 가치가 없기 때문에 그럴싸한 달변과 자극적이고 요란한 목소리로 사람들의 혼을 빼놓습니다.
유명한 주석가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이 구절을 해석하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내용이 없을수록, 미련함은 폭력적이고 뻔뻔한 강요로 사람을 윽박질러 이기려 든다"고 통찰했습니다.
현대 문화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세속주의의 목소리가 이와 똑같지 않습니까? 오늘날의 세상은 수십 초짜리 숏폼 영상과 자극적인 썸네일, 그리고 화려한 광고들로 끊임없이 시끄러운 소음을 만들어내며 우리 영혼이 조용히 하나님을 묵상할 단 1분의 시간조차 빼앗아 갑니다.
미련한 여인의 유혹이 얼마나 악랄한지 15절을 보십시오. 그녀가 노리는 주된 사냥감은 이미 방탕하게 타락한 자들이 아니라,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인들"입니다.
매일 아침 큐티(QT)를 하며 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발버둥 치는 성도들, 일터에서 묵묵히 땀 흘려 일하며 정직하게 자녀들을 키우려는 신실한 아버지와 어머니들, 어떻게든 믿음 안에서 똑바로 걸어가려는 바로 그 사람들을 향해 사탄의 지독한 유혹은 집요하게 손짓합니다.
이 여인이 던지는 치명적인 메시지의 핵심이 17절에 등장합니다.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
이 문장은 인간 내면의 깊게 타락한 본성을 정확하게 꿰뚫는, 너무나도 소름 돋는 악마적 카피라이팅입니다.
우리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십시오. 부모님이 허락하신 식탁에 놓여 있던 건강한 음식보다, 밤에 부모님 몰래 숨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먹던 불량식품이나 라면이 유독 기가 막히게 맛있게 느껴졌던 기억이 있으실 것입니다. 죄의 심리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된 뱀의 속삭임입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금지하신 바로 그 선악과가 유독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여" 보였던 것처럼, 죄악은 언제나 금지된 선을 넘을 때 발생하는 일탈의 짜릿함을 미끼로 던집니다.
성경의 시적 메타포에서 '물과 떡'은 인간이 누리는 근본적인 만족, 특히 성적인 친밀함이나 애정을 은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앞서 잠언 5장 15절에서는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고 권면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맺어주신 부부 관계 안에서의 순결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누리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여인은 이 거룩한 테두리를 갑갑하고 지루한 것이라고 폄하합니다. 대신 '훔친 물', 즉 배우자 외의 사람과 나누는 불륜이나 은밀한 성적 타락, 혹은 정직한 노동이 아니라 남을 속여 빼앗은 부정직한 재물, 들키지 않고 즐기는 은밀한 온라인의 쾌락이 훨씬 더 짜릿하고 매력적이라고 속삭입니다.
현대 사회는 온갖 드라마와 영화,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도둑질한 물'을 낭만과 자유, 그리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으로 화려하게 포장하여 우리 눈앞에 끊임없이 들이밉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 짜릿함의 끝에는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18절은 죄의 화려한 포장지를 갈기갈기 찢고 그 속에 감춰진 섬뜩한 진실을 만천하에 폭로합니다.
"오직 그 어리석은 자는 죽은 자들(the dead)이 거기 있는 것과 그의 객들이 스올(Sheol)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스올(Sheol)은 죽은 자들의 영혼이 내려가는 음부, 곧 영원한 지옥을 의미합니다. 미련한 여인이 거만하게 앉아 있는 화려한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 보면, 그곳은 달콤한 향기가 진동하는 파티장이 아니라 썩은 악취가 진동하는 영적 무덤이며, 먼저 유혹에 넘어가 파멸당한 수많은 영혼의 시체들이 산처럼 쌓여 있는 잔혹한 도살장입니다.
쥐를 잡는 덫을 생각해 보십시오. 덫 위에는 아주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피넛 버터나 치즈 조각이 올려져 있습니다. 쥐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노력 없이 공짜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만찬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미끼를 무는 순간, 날카로운 철사가 목을 부러뜨립니다. "도둑질한 물"이 주는 죄의 달콤함은 덫 위에 놓인 피넛 버터와 같습니다. 그 유통기한은 찰나의 순간처럼 너무나도 짧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쾌락 뒤에 찾아오는 내 영혼의 산산조각 난 파괴, 평생을 일궈온 사랑하는 가정의 처참한 붕괴,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 고통, 그리고 결국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되는 스올의 형벌은 결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처절합니다.
사탄은 언제나 죄가 주는 찰나의 매력적인 시작만 보여주고, 그 비참한 결말은 철저히 우리 눈에서 숨기는 우주 역사상 가장 악랄한 사기꾼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의 인생을 부르는 두 여인의 초대장을 한눈에 비교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과연 매일의 일상 속에서 이 두 가지 목소리 중 어느 것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지혜의 식탁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도둑질한 물을 마시며 스스로 무덤을 향해 걸어갈 것인가. 이 선택에는 결코 타협이나 중간 지대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잠언 9장이라는 위대한 본문을 통하여 우리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두 여인의 상반된 초대를 직면했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땀 흘려 희생하며 생명의 떡을 준비한 지혜의 거룩한 잔치와, 훔친 물로 잠시의 쾌락을 속삭이며 결국 사망의 스올로 이끄는 미련한 여인의 값싼 유혹이 지금도 우리의 눈앞에 팽팽하게 놓여 있습니다. 두 여인 모두 성읍 높은 곳에서 소리치며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오라!"고 우리를 동일하게 부르고 있습니다.
이 부름 앞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가져야 할 태도는, 뼈아프지만 겸손하게 우리 자신의 영적 한계와 무지, 즉 내가 바로 '어리석은 자(페티)'임을 철저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호주라는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리고 이민자로 살아가며, 먹고사는 문제에 부딪히다 보면 때로는 쉽게 낙심하고, 세상의 가치관과 타협하고 싶은 수많은 유혹 앞에 갈대처럼 흔들리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십자가 앞에 솔직하게 토로한 후, 나의 발걸음을 어느 집을 향해 돌리느냐 하는 영적인 결단입니다.
세상의 요란한 소음, "훔친 물이 달콤하다"며 당신의 가정을 무너뜨리고 영혼을 파괴하려는 사탄의 속삭임에서 과감히 귀를 막고 돌아서십시오. 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신 영원한 지혜의 본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식탁으로 힘차게 나아오십시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 주님의 책망을 달게 받으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만이 이 험악한 세상 속에서 참된 생명과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때로는 성경을 펴고 설교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이 나의 굳은 교만을 날카롭게 찌르고 뼈아픈 책망으로 다가와 마음이 불편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자존심이 상한다고 해서 '거만한 자(레츠)'처럼 분노하거나 말씀을 튕겨내지 마십시오. 그것은 나를 영원한 죽음에서 건져내어 온전케 하시려는 하늘 아버지의 피 묻은 사랑의 메스임을 기억하며, 눈물과 감사로 그 말씀을 품으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지금 이 순간 남모르게 짓고 있는 은밀한 죄, 그 누구도 모른다고 착각하며 '도둑질한 물'의 달콤함에 깊이 빠져있는 분이 계신다면, 오늘 당장 그 사망의 파티장에서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치십시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유일하고도 영원한 참된 지혜가 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그분과 동행할 때, 우리는 비로소 좋은 남편과 아내가 되고, 신실한 부모가 되며,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지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다가오는 새로운 한 주간, 분주하게 돌아가는 치열한 삶의 현장 속에서도, 하나님의 지혜의 근본이신 여호와를 가장 깊이 경외하시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님의 식탁에 머물며 영혼의 배부름을 누리고, 넉넉히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는 우리 모든 지체들이 되시기를, 여러분의 영혼을 진실로 사랑하는 목회자의 가슴을 담아 간절히, 또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의 생명의 떡이 되시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참된 지혜의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잠언 9장의 거룩한 말씀을 통하여, 생명을 주려는 지혜의 잔치와 사망으로 이끄는 미련한 유혹이라는 두 갈래 길 앞에 서 있는 우리 자신을 적나라하게 발견하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하신 이 불변의 진리를 우리의 심비에 깊이 새기게 하옵소서.
오 주님, 우리는 너무나도 연약하고 어리석어 때로는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있다'(잠 9:17)는 세상의 시끄럽고 거짓된 유혹에 쉽게 흔들릴 때가 많았음을 눈물로 고백합니다. 이 땅에서의 고단한 삶의 무게에 짓눌려 십자가의 길을 버려두고 편법과 타협의 길을 걷고 싶었던 우리의 모든 무지함과 교만을 예수 그리스도의 붉은 보혈로 깨끗하게 씻어 주옵소서.
지혜가 "그의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잠 9:1) 우리를 위해 완전하고 견고한 구원의 식탁을 예비하신 것처럼, 자격 없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희생의 제물이 되어주신 예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을 매일매일 맛보아 알게 하옵소서.
누군가 말씀으로 나의 죄를 책망하고 권면할 때,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방어벽을 치고 화를 내는 거만한 자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오히려 그 책망을 은혜로 달게 받아들이고 겸손히 돌이켜 더욱 지혜로워지는 생명의 사람, 명철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의 가정과 일터를 눈동자처럼 지켜 주시옵소서. 세상의 요란하고 공허한 소음들이 우리 내면을 어지럽힐 때마다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이게 하시고, 그 매혹적인 유혹의 끝이 죽음의 스올(잠 9:18)임을 꿰뚫어 보는 영적 분별력을 더하여 주옵소서.
이번 한 주간 세상의 헛된 속삭임을 능히 이겨내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룩한 떨림과 감격으로 생명의 식탁에 머무는 승리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지혜요 흔들리지 않는 생명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