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온 하늘의 지혜

잠언 10장 강해

by Joseph H Kim

지혜의 성소에서 일상의 거리로 나아가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며 나아오시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잠언 1장부터 9장에 이르는 장엄하고도 깊은 신학적 서곡을 함께 지나왔습니다. 잠언 9장 10절이 선포하듯,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라는 대전제는 우리의 신앙이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짚어주었습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흘러나오는 지혜야말로 세상을 이기는 진정한 힘입니다.


이제 잠언 10장부터는 그 거룩한 지혜가 흙먼지가 날리는 우리네 일상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옵니다. 예배당 안에서 선포되던 하늘의 지혜가 이제는 우리의 부엌으로, 거실로, 직장으로, 그리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내려와 구체적인 이정표가 됩니다.


잠언 10장 1절은 솔로몬의 잠언이라라는 새로운 표제와 함께 시작됩니다. 이때부터 22장 16절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단락은 짧고 간결한 경구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특히 10장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문학적 특징은 바로 반의적 대구법(Antithetical Parallelism)입니다. 상반절과 하반절이 접속사 그러나를 중심으로 선명한 대조를 이루며, 의인과 악인,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날카롭게 대비시킵니다.


이러한 구조는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은 히브리 문학이 가진 고도의 수사학적 장치인 동시에, 신앙이란 매 순간 빛과 어둠 사이에서 결단해야 하는 영적 전투임을 일깨워주는 신학적 메시지입니다. 칠십인역(LXX)이라 불리는 고대 헬라어 번역본을 살펴보면, 번역자들은 히브리어 원문(MT)의 압축된 대구법을 헬라어 독자들에게 보다 생생하고 교훈적인 언어로 풀어서 전달하려 했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잠언의 말씀이 단순히 고대의 죽은 문자가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여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할 살아 숨 쉬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명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위대한 지혜의 말씀을 학문적 원리에 입각하여 깊이 있게 파헤치면서도,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음성으로 듣고자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여사, 말씀 속에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하게 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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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지혜가 열매 맺는 첫 번째 토양

솔로몬의 잠언이라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 (1절)


잠언 10장의 첫 문을 여는 1절은 지혜와 미련함의 결과를 가정이라는 가장 친밀하고 원초적인 관계망 속에서 조명합니다. 여기서 지혜로운(하캄)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단순히 IQ가 높거나 처세술에 능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훈계를 겸손히 수용하고, 일상 속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실천적 경건을 살아내는 자를 뜻합니다. 반면 미련한(케실)이라는 단어는 지적 결핍이 아닌, 하나님을 배제한 채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도덕적, 영적인 완고함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은 한 사람의 영적 상태가 결코 개인의 고립된 차원에 머물지 않고, 관계의 중심인 부모에게 깊은 기쁨이나 뼈아픈 근심을 안겨준다는 영적 연대성을 보여줍니다. 아비의 기쁨은 자녀가 올바른 신앙의 길을 걸을 때 부모의 눈물 어린 기도와 수고가 열매를 맺는 언약적 성취의 환희입니다. 반대로 어미의 근심(투가트)은 생명을 품었던 자가 겪는 깊은 애통과 내면의 고통을 절절하게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할 때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돌아보게 됩니다. 늘 일로 바빠서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갖지 못하던 한 아버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가족을 먹여 살린다는 명목하에 늦게까지 일했고, 집에 돌아와서는 아이들의 잠든 모습만 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자녀가 큰 수술을 받게 되었고, 아버지는 만사를 제쳐두고 그날만큼은 아이 곁을 떠나지 않고 보살펴주었습니다. 수술이 끝난 후, 아프고 힘들 만도 한데 아이는 내내 싱글벙글 웃으며 "아빠, 오늘 하루가 너무 기뻐요"라고 말했습니다. 아빠가 의아해하며 묻자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아빠가 오늘 하루 종일 저와 함께 계셨잖아요".


우리는 자녀의 세속적인 성공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지만, 정작 그들의 영혼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자로 자라나도록 이끌고 함께 해주는 일에는 너무나 인색하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진정한 지혜의 전수는 부모가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본을 보일 때 이루어집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것은, 이 잠언을 기록한 솔로몬조차 그의 생애 후반부에는 이방 여인들을 좇아 우상을 숭배함으로 이스라엘 역사에 큰 근심을 안겨준 어리석은 아들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지혜는 한 번 소유하고 끝나는 트로피가 아닙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엎드려야 하는 현재 진행형의 은혜입니다.


재물과 성실함, 하늘의 경제학


불의한 재물의 헛됨과 공의의 구원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 공의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 (2절)

여호와께서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 않게 하시나 악인의 소욕은 물리치시느니라 (3절)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르느니라 (16절)


잠언 10장은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현실적인 문제, 곧 경제와 재물에 대한 하나님의 시각을 명확히 제시합니다. 불의의 재물은 속임수나 억압, 정당한 땀을 흘리지 않고 부당하게 얻은 이익을 말합니다. 세상의 가치관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단 부자가 되는 것을 성공이라 칭송하지만, 성경은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그러한 재물은 당장에는 견고한 성처럼 보이나 영혼을 병들게 하며, 궁극적인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헛것에 불과합니다.


반면 공의(체다카)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비롯된 정직하고 이타적인 삶의 방식을 의미하며, 오직 이것만이 영혼을 사망에서 건져낼 수 있습니다. 3절은 하나님의 자상한 섭리와 공급하심을 확증합니다. 여호와께서 의인의 영혼은 굶주리지 않게 하신다는 약속은, 우리를 물리적인 궁핍에서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우리의 내면을 채우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돌보심을 뜻합니다.


반대로 악인의 소욕(크레이빙)은 밑 빠진 독처럼 끝이 없으나, 하나님은 결코 그 탐욕이 영원히 성취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마침내 물리치십니다. 이는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이 때로는 억울한 손해처럼 느껴지는 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성도들이 흔들림 없이 붙잡아야 할 궁극적인 안전장치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거룩한 땀방울, 부지런함의 영성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4절)

여름에 거두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나 추수 때에 자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이니라 (5절)


이 구절에 등장하는 부지런한 자의 손(야드 하루침)에서 부지런한을 뜻하는 히브리어 하루츠는 매우 흥미롭고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뾰족하게 날이 선, 예리한, 혹은 결단력 있는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부지런함은 그저 생각 없이 몸만 바쁘게 움직이거나 남들보다 수면 시간을 줄여가며 일 중독에 빠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루츠의 부지런함은 마치 예리하게 벼려진 도구를 다루는 장인처럼, 자신의 목적과 소명을 향해 일관되고 날카롭게 에너지를 집중하는 거룩한 끈기입니다. 그것은 방향성 잃은 분주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향한 목적 있는 진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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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게으른 손(카프 레미야)은 나태함과 동시에 속임수라는 뉘앙스를 내포합니다. 땀 흘려 일하기는 싫어하면서 결과만 얻으려 하는 얄팍한 마음입니다. 5절은 이러한 게으름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를 농경 사회의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추수 때에 잠을 자는 자는 단순히 개인의 게으름을 넘어, 일손이 가장 절실한 때에 가족과 공동체에 깊은 수치와 손해를 끼치는 자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종종 영적인 핑계로 삶의 치열한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앞서 언급한, 매일같이 복권에 당첨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던 사람의 우스갯소리를 떠올려 보십시오. 수십 년의 간절한 기도 끝에 하늘에서 들려온 "얘야, 제발 복권이라도 한 장 사고 나서 기도하렴!"이라는 하나님의 탄식은 우리에게 뼈아픈 교훈을 줍니다.


행동하지 않는 믿음, 수고하지 않는 기도는 영적 게으름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예리하고 부지런한 성실함(하루츠)이라는 그릇에 담겨 세상을 향해 흘러넘치게 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근심 없는 순전한 복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22절)


22절은 재물과 복에 관한 성경적 가치관의 정수를 우리 마음 판에 새겨줍니다. 원어에서 근심(에체브)이라는 단어는 살을 에는 듯한 고통스러운 수고, 심장 한가운데를 짓누르는 불안과 염려를 뜻합니다. 세상의 방식대로 남을 짓밟고 편법으로 이룬 부유함의 이면에는 예외 없이 이 에체브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의 비참한 말로를 자주 접합니다. 정당한 수고 없이 갑자기 쏟아진 재물은 형제간의 소송을 부르고, 삶의 소박한 의미를 파괴하며, 결국 우울증과 가정의 파멸로 이끄는 독약이 되곤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다릅니다. 그것은 정직한 땀방울을 통해 주어지는 일상의 결실이며, 밤에 두 다리를 뻗고 단잠을 잘 수 있는 양심의 평안을 동반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안에서 누리는 부요함에는 뒤탈이 없으며, 영혼을 좀먹는 독소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헛된 부유함 그 자체가 아니라, 내 삶이 하나님의 순전한 복 안에 머무르기를 사모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입술의 권세,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언어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11절)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19절)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20절)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어 죽느니라 (21절)


잠언 10장의 중반부는 인간관계의 가장 강력한 도구인 언어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룹니다. 11절에서 솔로몬은 의인의 입을 생명의 샘(메코르 하임)으로 묘사합니다. 일 년의 대부분이 건기인 메마른 팔레스타인 광야 지역에서 끊임없이 맑은 물이 솟아나는 오아시스와 같은 샘은 곧 생존의 절대적인 근원입니다.


의인의 언어는 바로 이 생명의 샘과 같아서, 자신의 영혼을 적실 뿐만 아니라 상처받고 갈증에 지친 주변 영혼들에게 위로와 소망, 영적 회복을 제공합니다.


이 생명의 샘이라는 구약의 은유는 신약성경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벽하게 성취됩니다. 예수님은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을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생수(요한복음 4:14)로 소개하셨고, 초막절 명절 끝날에는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한복음 7:38)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의 언어는 정죄와 판단의 날 선 검이 아니라, 죽어가는 영혼을 살려내는 따뜻한 생명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생명의 언어는 역설적이게도 침묵과 절제를 통해 훈련됩니다. 19절은 인간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비극의 근원을 정확히 짚어냅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언어의 범람은 필연적으로 실언과 가십, 상처를 동반합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의 입술이 얼마나 통제하기 힘든 지체인지를 꼬집는 어느 유머러스한 외국의 고백이 떠오릅니다. 한 성도가 자신의 언어 습관을 한탄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 입은 제 뇌가 생각을 뒤집기도 전에 베이컨을 구워내는 뜨거운 프라이팬보다 빠릅니다!".


내가 꼭 말해야 할 것 같고, 내가 나 나서서 정답을 가르쳐주어야 할 것 같은 그 충동의 순간에 입술을 닫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고통스러운 자기 부인입니다.


입술을 제어한다는 것은 단순히 할 말이 없어서 침묵하는 멍청함이 아닙니다. 내 안에서 쏟아져 나오려는 수많은 판단과 혈기, 억울함을 성령의 은혜로 억누르고 정제하는 고도의 영적 훈련입니다.


이처럼 용광로에서 불순물을 제거하듯 절제되고 연단된 의인의 혀는 제련된 은(천은, choice silver)과 같이 순수하고 고귀하며(20절), 수많은 사람을 진리로 이끄는 귀한 양식이 됩니다(21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 앞에서 터져 나오는 억울함을 누르시고 털 깎는 자 앞의 어린양처럼 침묵하셨기에 우리가 구원을 얻었듯, 우리의 십자가 지는 침묵이 다른 누군가를 살리는 능력이 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 허다한 죄를 덮는 십자가의 영성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12절)


잠언 전체를 통틀어 가장 심오하고 복음적인 향기를 내뿜는 구절이 바로 12절입니다. 이 구절은 훗날 사도 베드로에 의해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베드로전서 4:8)로 인용되며, 초대 교회 공동체가 핍박 속에서도 하나 될 수 있었던 핵심 윤리로 자리 잡게 됩니다.


여기서 허물을 가린다(히브리어 카사)는 것은 누군가의 심각한 범죄를 눈감아주거나 불의를 적당히 타협하고 은폐하라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더러운 쓰레기를 양탄자 밑으로 쓸어 넣어 보이지 않게 감추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카사(덮음)는 속죄소(시은좌)에서 희생제물의 피로 이스라엘의 죄를 덮는 대속적이고 구원론적인 행위를 의미합니다.


즉, 누군가의 연약함과 실수를 발견했을 때 그것을 동네방네 떠벌리거나 정죄의 도마 위에 올려 난도질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덮어주며 나 자신의 기도의 제목으로 삼아 끌어안는 창조적인 행위입니다.


미움은 결코 마음속에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미움은 반드시 뾰족한 언어와 배타적인 행동이라는 열매를 맺어 공동체 안에 깊은 분열의 상처를 남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역시 감정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타인의 상처를 싸매고 허물을 덮어주는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타납니다.


가슴 따뜻한 목회 현장에서 성도들의 교제를 지켜볼 때 이 말씀이 얼마나 절실히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교회 안에서도 타인의 작은 티끌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며 비판의 날을 세우기란 너무나 쉽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허물을 나의 등 뒤로 던져버리고, 따뜻한 겉옷으로 그 수치를 덮어주는 자가 바로 십자가를 통과한 진정한 지혜자입니다.


우리가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 자녀라 불릴 수 있는 유일한 이유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그 끔찍하고 허다한 죄악들을 온전히 덮어주셨기 때문이 아닙니까? 이 은혜를 아는 자만이 형제의 허물을 덮을 수 있습니다.



의인과 악인의 궁극적 결말과 영원한 기초

미련한 자는 행악으로 낙을 삼는 것 같이 명철한 자는 지혜로 낙을 삼느니라 (23절)

악인에게는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거니와 의인은 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느니라 (24절)

회오리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기초 같으니라 (25절)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식초 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 (26절)


잠언 10장의 후반부는 지혜의 길을 걷는 의인과 미련함의 길을 고집하는 악인의 궁극적인 결말을 선명하게 대조하여 보여줍니다. 악인은 자신의 은밀한 죄악으로 인해 깊은 내면에 심판에 대한 쫓기는 두려움을 품고 살아갑니다. 불안 속에서 방황하던 그에게 결국 그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파멸이 머리 위에 떨어지고 맙니다(24절).


25절의 회오리바람 비유는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의 결론부에서 말씀하신 두 건축자의 비유(마태복음 7장)를 깊이 연상하게 합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예고 없이 무서운 회오리바람이 불어옵니다. 질병의 바람, 재정적 위기의 바람,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이라는 바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불꽃 같은 심판의 바람입니다.


세상의 헛된 기초, 곧 불의한 재물과 속이는 입술 위에 세워진 악인의 삶은 이 바람 앞에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립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하는 참된 신앙 위에 삶을 쌓아 올린 의인은, 어떠한 인생의 폭풍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기초(an everlasting foundation)를 소유한 자입니다.


이 엄숙한 대목에서 솔로몬은 다시 한번 빙그레 웃음을 짓게 만드는 재치 있고 휴머니스트적인 비유를 26절에 삽입합니다. 일하기 싫어하는 게으른 자를 심부름 보낸 주인의 애타는 심정을 "이에 닿는 식초 같고 눈을 맵게 하는 연기 같다"고 묘사합니다.


시린 이에 신 식초가 닿았을 때의 그 찌릿한 고통, 매운 연기 때문에 눈물이 줄줄 흘러 앞을 볼 수 없는 답답함. 일을 맡겨놓고 속이 타들어 가는 주인의 생생한 묘사가 우리의 무릎을 치게 만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거울삼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과 공동체 보시기에 한여름의 얼음냉수처럼 상쾌하고 시원한 존재입니까, 아니면 눈을 뜰 수 없게 만드는 매운 연기 같은 존재입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수명은 짧아지느니라 (27절)

의인의 소망은 즐거움을 이루어도 악인의 소망은 끊어지느니라 (28절)

여호와의 도가 정직한 자에게는 산성이요 행악하는 자에게는 멸망이니라 (29절)

의인은 영영히 이동되지 아니하여도 악인은 땅에 거하지 못하게 되느니라 (30절)

의인의 입은 지혜를 내어도 패역한 혀는 베임을 당할 것이니라 (31절)

의인의 입술은 기쁘게 할 것을 알거늘 악인의 입은 패역을 말하느니라 (32절)


27절은 잠언 전체의 주제인 여호와를 경외함이 생명의 본질임을 재차 선언합니다. 우리가 현실을 살아갈 때 간혹 악인이 형통하며 장수하고 의인이 불의의 사고로 일찍 생을 마감하는 뼈아픈 모순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성경적 지혜 문학이 말하는 장수란 단순히 심장이 뛰는 생물학적 수명의 연장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누리는 충만한 샬롬(평강)이며, 육신의 죽음을 넘어 영원으로 이어지는 궁극적인 생명의 풍성함입니다. 반면, 하나님 없는 악인의 소망과 화려함은 결국 안개처럼 허무하게 끊어질 뿐입니다(28절).


잠언 10장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31절과 32절은 다시 한번 입술의 열매를 강조하며 장의 문을 닫습니다. 의인의 입술은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어떻게 하면 상처받은 이웃을 세우고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할지를 본능적으로 깨달아 은혜로운 말을 베풉니다.


반면, 악인의 입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기에 끊임없이 타인을 깎아내리고 파괴하는 패역(거짓과 왜곡)만을 뱉어냅니다. 우리의 혀가 생명을 피워내는 아름다운 꽃이 될 것인가, 아니면 베임을 당할 날카로운 가시덤불이 될 것인가는, 매 순간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덧입는 일상의 거룩함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잠언 10장의 말씀을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날마다 마주하는 수많은 일상의 선택지 앞에서, 나침반처럼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의 길을 향해 방향을 잡으라는 하나님의 사랑 담긴 촉구입니다.


우리는 과연 가정에서 어떤 부모와 자녀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일터에서 불의한 이익을 거부하고 날카로운 하루츠의 성실함으로 땀 흘리고 있습니까? 혀를 통제하지 못해 타인의 마음에 불을 지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상처를 싸매는 생수의 강을 흘려보내고 있습니까? 형제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자입니까, 아니면 사랑으로 덮어주는 자입니까?


이 모든 일상의 소소해 보이는 질문들은, 결국 우리가 십자가의 복음 앞에 온전히 엎드려 있는가를 가늠하는 영적 시금석이 됩니다.


인간의 얄팍한 의지나 도덕적 수양만으로는 결코 우리의 입술에서 맑은 생수를 낼 수 없으며, 모든 허물을 덮어주는 그 아가페의 사랑을 흉내 낼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완전한 지혜이시며, 하나님 아버지를 가장 기쁘시게 한 참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치명적이고 더러운 죄와 허물을 십자가의 붉은 피로 완전하게 덮어주셨기에, 우리 역시 이웃의 허물을 덮어주는 넉넉하고 따뜻한 사랑의 삶을 살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귀한 지혜의 말씀이 머릿속의 교리적 지식으로 굳어지지 않기를 원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서 있는 그 가정과 일터, 그리고 성도 간의 따뜻한 교제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생명의 언어와 성실한 손길로, 하나님을 미소 짓게 해드리는 아름다운 열매로 맺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영혼을 품고 드리는 목회적 기도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잠언 10장의 깊고 오묘한 말씀을 통해 거룩한 예배당을 넘어 우리의 땀 흘리는 일상 한가운데 숨 쉬고 계시는 하늘의 지혜를 바라보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가 살아가는 날들 속에서 지혜로운 자녀가 되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헛된 불의의 재물을 향한 탐욕을 단호히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고, 뾰족하고 예리한 성실함으로 우리에게 맡겨진 일터와 가정을 정직하게 가꾸어가는 거룩한 일꾼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22절) 하신 그 신실하신 약속을 굳게 붙잡습니다. 세상이 주는 두려움과 불안한 탐욕이 아니라, 주님이 허락하시는 순전하고 평안한 일상의 복을 감사함으로 누리게 하옵소서.


무엇보다도 우리의 다듬어지지 않은 입술을 성령의 제단 숯불로 지져주시고 다스려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19절) 하신 말씀처럼, 내가 옳다는 교만과 섣부른 정죄의 언어를 침묵으로 거두어들이는 영적 절제력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오직 우리의 입술이 타오르는 영혼의 목마름을 해갈하는 "생명의 샘" (11절)이 되게 하시고, 미움으로 다툼을 일으키는 자가 아니라 십자가의 뜨거운 사랑으로 이웃의 모든 연약함과 허물을 가려주고 품어내는 (12절) 따뜻한 치유자가 되게 하옵소서.


인생의 거센 회오리바람이 몰아쳐 우리의 모든 것을 뒤흔드는 그 순간에도, 우리의 영혼이 모래 위가 아닌 십자가라는 "영원한 기초" (25절) 위에 단단히 뿌리내리게 하옵소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벅찬 하루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아름다운 동행의 걸음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우리의 영원한 지혜요 생명의 생수가 되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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