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 결과를 기다리며
금요일에 나오기로 되어있었던 입시 결과가 아직이다. 금요일 오후, 계속 메일을 확인하며 긴장감 넘치는 시간을 보냈다. 결국 토요일 아침에 결과 통보가 늦어지고 있다고 이메일을 받고는, 허탈했다. 내일이나 모레쯤에는 결과가 나올 것이다.
금요일 밤, 사실 내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내 마음을 정하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학교에 합격된다고 해도, 먼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은 가족들에게 재정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무리이다.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길 수 있다. 친절한 가부장인 남편의 성실함과 자상함에 의지하며 살아온 지 오래되었다. 이렇게 10년 살아온 김에, 앞으로 10년 더 그렇게 살아서라도 내 목표를 이루는 것이 맞는 것 혹은 건강한 것일까? 문제는 현재 시점으로, 그렇게 10년 살아온 결과가 좋은 결과만 낸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물론 살았다.
결혼할 당시의 나는 개차반이었다. 교회와 기독교에 대한 실망과 의문으로 대학 졸업 후 일하게 된 비영리 기관도 답이 아니었다. 정서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나를 끌어주고 내가 의지할만한 누군가를 계속 찾고 있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며, 누군가를 이끌기도 하고 돕기도 했고, 가족의 생계를 돕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정서적으로 어른이 아니었다. 내게 태어나서부터 주어진 역할인 딸로서, 신앙인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에 나름의 최선을 다했지만, 내 두 발로 설 준비는 되어있지 않았다. 정서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성인으로써 독립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여러 분야에서 많은 조언을 구했다. 하지만 내가 결론을 내리고 책임질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문가에게 구하는 조언은 쓸모가 없었다. 내게 당시에 필요했던 것은, 로드맵을 찾는 것이 아니었다. 망하든 어떻든 사회로 한 걸음, 나 스스로 내디뎌 보는 것이었다. 한창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유행하던 시기였고, 멘토링의 붐이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나에게 그 "누군가"는 나만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론은 나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 도무지 방법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담은 부담대로, 내가 뭔가 모자란 사람이라는 답답함은 답답함대로 가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누군가 나의 우수함을 알아봐 주어 유학시켜 주기를 바랐고, 20대 초중반 시절에는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누군가 나를 알아봐 주어 진로를 정해주고 끌어주기를 바랐다. 어린 시절부터 읽어온 성서에서는,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처가 살이하던 전과자이자 도망자 모세에게 나타나 출애굽의 사명을 주신 이야기, 어부로 일하다가 예수님의 제자로 선택된 베드로 이야기, 예수님을 따르는 유대교의 분파를 비판하다가 다메섹 길 위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기독교의 초석을 놓은 바울의 이야기. 누구든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나에게도 그런 특별한 은혜를 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천지분간 못하는 나를 어떻게든, 의심할 수 없이 확실한 어떤 경로로 나를 인도하시는 은혜. 하지만 내 믿음이 부족했던 탓인지, 아니면 그런 길을 보여주셨는데 내가 알아보지 못한 것인지, 그런 일은 나에게 일어나지 않았다. 자격증도, 기술도, 경험도, 취업 준비도 제대로 안 하고 졸업한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다행스럽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결과가 어떻든 내가 책임지겠다고 마음먹고 내디딘 첫걸음은, 좋은 타인과의 결혼이었다. 성실하고 자상하고 나와의 장거리 연애에도 열심이었고, 어디든 살 수 있는 그. 무엇보다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하는 모습이 멋있었다. 잘 웃고 믿음직한 그의 모습이 좋았다. 생각 많은 나와 다르게, 현실적이고, 문제 해결에 적극적인 모습이 좋았다. 교회에서도,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미숙한 나를 도와주는 친절한 분들을 만났지만, 한계가 있다고 느끼던 차였다. 여전히 아이 같은 20대 중반의 나를 키워줄 "누군가"는 없었다. 어차피 "누군가"가 없다면, 같이 헤맬 동반자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청혼을 받고, 그런 이유로 결혼을 결심했다. 그때에도 내가 나를 끌어볼 생각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밑으로 갈 수 누군가가 없는 건 명확했다. 친절한 타인도 타인이었다. 내가 나를 끌어서 할 수 있었던 것은, 좋은 사람의 곁이라도 가는 것이었다. 내가 선택한 가족도 타인이지만, 그때는 좋은 가족이라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학원, 기숙사, 자취 생활로 질 좋은 가정생활의 경험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던 차였다. 그렇게 남편과의 2인 3각 라이프가 시작되었다.
우리의 2인 3각 경기. 현재 결과는? 귀여운 딸 둘이 생겼다. 우리는 여전히 삶의 동반자로 함께이다. 나는 남편 덕분에 더 현실적으로 되어, 결혼하고는 과외로 학자금 대출을 다 갚았다. 미국에 와서는 의료 계통으로 진로를 바꿀 수 있었다. 남편도 나 덕분에 더 현실적으로 되었고, 커리어도 개발했고, 자신의 복잡한 정체성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서로의 한 다리가 묶인 만큼, 포기한 것도 있었다. 내가 공부/아르바이트하는 동안 자산 형성에 큰 기여를 하지 못했고, 남편은 살고 싶던 곳을 떠나야 했고, 나도 살고 싶은 곳에 살지 않게 되었다. 남편은 의도치 않게 더 책임감이 강하고 유능하게 되었고, 나는 의도치 않게 무력해졌다. 누군가 나에게 남편이 벌어서, 절실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한 적이 있었다. 이민 생활의 맥락은 무시한 말이라고 생각되지만, 맞는 말이기도 하다. 30대 어른이지만 무직 지망생으로서 하는 공부, 엔트리 레벨의 일, 봉사활동은 어느 순간 성장에도, 재정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 매너리즘에 빠지고 있을 때, 진로가 결정될 때까지로 미루고 있던 임신과 출산을 하기로 결심했고, 다행스럽게도 엄마가 될 수 있었다.
엄마가 되자 이런 미확정인 상태로 계속 살 수는 없다고 판단, 학교 3군데에 어떻게든 써서 원서를 제출했다. 제일 가고 싶던 곳은 대기자 명단 가운데 토막, 먼 곳은 곧, 다른 곳은 아마 5-6주 후에 결과가 나올 것이다. 먼 학교가 나를 불합격시킨다면, 갈까 말까의 고민은 무용하다. 하지만 그 고민은, 내가 꿈을 이유로 독립을 지연시키고 있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해 주었다. 이미 내 마음속으로는 발표될 입시 결과가 어떻든 어느 정도 결론이 난 상태이다.
연애와 까지 합치면 남편과 10년의 세월을 보냈다. 점잖고 어른스러웠지만 정서적으로 아이에 멈춰있던 나를 하드캐리한 남편에게, 그리고 다른 이유로 정서적으로 헤매고 있던 남편을 다독인 (소프트캐리?!) 나 모두 수고했다. 하지만 아이까지 태어난 마당에, 더 건강한 가족을 꾸리려면 재점검이 필요하다. 우선 이러한 마음으로, 다음 입시 결과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