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생활은 나와 맞지 않았다. 나와 다른 환경에서 꿋꿋하게 이겨내며 해낼 만큼 나의 성취욕, 지구력, 영어실력, 지능이 높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똑똑한 친구들이 많았지만, 내가 상상하던 똑똑한 친구들은 아니었다. 나도 내가 상상하던 똑똑한 아이가 아니었다. 나는 해외 경험도 없었고, 부모님은 유학이나 입시에 대해서 관심이 있거나 지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고등학교에 선생님들은 어디나 그렇듯 좋은 분들도 있었지만, 아닌 분들도 있었다. 신생 사립학교다 보니 학원 같은 느낌도 있었다. 나는 그 불안정한 느낌이 싫었다. 중학교 선생님들과 학원 선생님들은, 지금 생각해 보면 유니콘 급으로 아주 따뜻한 분들이었다. 교회 중등부 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고등학교에서도 의지할 사람을 찾았던 것 같다. 다행히, 학교 내에 좋은 신앙 공동체가 있어 그 생활에 매진했다. 어차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으니, 제일 중요한 우선순위를 지키고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사역자인 가족도 있었으니 그런 선택과 판단은 당연한 것으로 느껴졌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자연스레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기도모임도 이끌었고, 친구들 전도도 시도했고, 교회 선생님들을 열심히 따랐다. 그러면서도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나를 싫어했다. 선생님들도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았다. 중학교 때 다니던 종일 학습 학원을 고등학교 때 다니지 않으니, 학습에 어려움이 있었다. 무언가를 물어보면 나를 귀찮아할 것 같았다. 그런 심리적 장벽?을 극복할 만큼 욕심이 있지도 않았다. 그냥 내가 부족해서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했고, 어떤 도움도 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신앙보다도, 신앙생활이 나의 모든 것이던 때였다. 나에게 안정감을 주는 나의 루틴. 나의 존재 이유. 에릭 에릭슨이 당시의 나를 봤다면, 나는 아마 자아정체감 vs 역할 혼미 단계에서, 역할 혼미 상태였다고 볼 것 같다. 마르시아라는 학자가 본다면, 정체감 유실 (identity foreclosure) 상태였다고 볼 것 같다.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뭐가 문제인지 모르던 때였다. 도움을 청할 용기와 끈기도 없었다.
당시에 나에게는 어떻게든 유학을 가고 싶다는 생각과 꿈'만' 있을 때였다. 그런 나의 망상은 결국 제동이 걸리게 된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유학을 감당할 돈도, 정신력도 없었다. 혼자 깨우치지 못하니 아마 그런 외부적 압력을 주셨던 것 같다. 그 압력으로 인해 나는 국내 대학으로 방향을 틀면서 재수를 결정하게 되었고, 대학에 합격했다. 내 재수 생활은 기도하고, 과외하며 돈을 버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슬프게도, 대학 시절에도 나는 비슷한 생활을 했다. 기독교 단체에 들어가 활동에 매진하고, 영어로 진행되던 학과 공부는 등한시하고, 과외하며 돈을 벌었다. 과외는 내, 혹은 가족의 생활비로 쓰였다, 특히 대학교 1-2학년 때는.
유학은 계속 가고 싶었고, 고등학교 생활 2.0을 반복하던 중이었다. 당시에 하나님이 도우셨던 것은 다니던 대학에 기독교를 학문적/합리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신앙생활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던 의문들이 풀리는 동시에, 한편으로 공허감이 찾아왔다. 산타 할아버지가 사실은 부모님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기독교를 배우는 것은 재미있었고, 그런 쪽의 대학원 석사 진학과 박사 유학이 내 갈 길, 내 꿈, 내 새로운 희망이라고 생각했었다. 여전히 돈을 본격적으로 벌어야 된다는 생각도, 내가 유학 갈 능력이 없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도 없었다. 하지만 아마도 다시 한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나는 그런 신학을 더 공부하기 위한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게 된다. 학교의 무관심한 대처와 나의 잘못된 처신으로 학교에 의해 이단으로 의심받게 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내 친구가 그의 이단 모임에 참석했던 지인을 안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의심받았고, 그 때문에 꽤 공식적인 학교 모임에서 내 이름과 그 친구의 이름이 이단으로 지목되었다. 나는 이단이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이단이 아니라고 말을 못 했다. 너무 어이가 없었고, 수치심과 분노가 들었고, 이게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잘 판단이 안 되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종교 재판도 아니고, 거기서 내가 아니라고 소리쳐야 할 만한 자리라고 생각이 되지 않았다. 실제로 아니기도 했고. 거기가 뭐라고. 수치심은, 내가 봐도 외부에서 보기에 이단에 빠지기 좋은 대학생으로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 가난하고, 기독교 단체 사람들과 모여 살고, 보통 사람들은 취업 준비 하기 바쁜 시기에 기독교를 복수 전공까지 하는, 이상할 정도의 종교적 열심. 분노는, 당시 기독교 관련 수업을 열심히 듣던 터라, 어떻게 교수님들이 나를 의심할 수 있지 하는, 유아적인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좋은 사역자, 멘토들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당연히 그 교수님들도 나의 진심과 진실을 알아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를 한 학기 동안 강의실에서 만난 분들이 나를 뭘 안다고 나를 변호해 주겠는가. 사역자 가족도 있는데 이런 일에 연루되다니, 나 자신에 대한 실망도 컸다. 이런 실망과 환멸을 겪고 나니, 그 학교의 대학원은 절대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유로운 기독교를 배우기 위한 다른 마땅한 곳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그런 꿈도 좌절/보류되었다.
경력과 알바를 위해 회사 인턴도 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고, 결국 비영리 단체에 졸업과 동시에 들어갔다. 하나님의 의를 교회나 관련 기관이 아닌 세상에서 구하고 싶었다. 돈은 필요하니 계속 알바든 무엇이든 했다. 사실 나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안정적인 직장이었는데, 그것도 모를 정도로 내가 현실 감각이 없고 바보였다. 옆에서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스물다섯, 여전히 내 이상과 차가운 현실 사이를 갈팡질팡하며 헤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