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무덤 너머,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 (눅 24)

by 다시

중요한 것은, 무덤이 비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다시 사셨고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


예수님의 제자들 중 몇몇은 엠마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믿고 따르던 예수님이, 메시아도, 성공한 정치가는 아니더라도 좋은 예언자라고는 생각했던 예수님이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보고 그들은 심란했을 것이다. 비통하거나 애통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열두 제자에는 속하지 않았기에 예수와 긴밀히 얽히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을까. 게다가 빈 무덤이라니. 시신마저 도둑맞았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서, 그분에게 소망을 걸고 있었던 (눅 24:21) 때도 있었는데. 소망은커녕 절망도 이런 절망이 없다. 너덜너덜하던 시신마저 없어진 처참한 결말.


그들은 그 이야기를 하면서 걸어가다가,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된다. 예수가 누구인지, 그의 죽음이 뭔지 전혀 모르는 것 같은 그 사람에게 그들은 타박한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으면서, 이 며칠 동안에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당신 혼자만 모른단 말입니까? (눅 24:18)” 그러고는 츤데레처럼, 예수님의 사역과 죽음, 그리고 빈 무덤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까지 설명한다. 하지만 사실 타박받을 대상은 그 제자들이다. 그들이 한심해하던, 세상물정 모르는 데다 자기들의 대화에 끼어들기까지 하는, 눈치 없는 저 사람이 사실 예수님이라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다.


내 신앙도, 예수님의 사역을 쫓아다니다가 십자가형을 목격, 이후 빈 무덤을 발견하고 의아해하는 것에 멈춰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은 당시 좋은 신분도, 학력도 없었지만 율법의 정수를 잘 이해하고 배제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비유로, 기적으로 쉽게 알려주셨다. 하지만 연줄도 없으면서 로마의 눈치도 유대인들의 눈치도 보지 않고 옳은 소리만 한 대가는 십자가형이었다. 역시 뒷배도 없이 착하기만 한 사람은 운 없으면 저렇게 죽는구나. 죽은 사람만 불쌍하지. 허무하다. 그런데 시신은 어디 갔을까. 제자들은 혹은 무리들은 그런 생각들을 했을 것이다. 2024년, 한국에서 글로만 예수님을 배운 나도, 오랫동안 이 생각에 정체되어 있었다. 예수님의 몸은 어디로 간 걸까. 예수님의 몸이 정말 살아날 수 있을까? 전통적인 기독교에서 핵심 진리라고 배워온 부활을 믿을 수 있나? 기독교 내에서도 부활에 대해 다양하고 복잡한 대화가 있는 것 같지만, 내가 배워온 기독교에서는 몸의 부활을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이런 생각에 골몰한 내 상태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눈이 닫혀 있는" 상태였던 것 같다. 정말 부패한 몸 그대로 회복했는지, 우리가 알 수 없는 새로운 육체로 부활했는지, 영으로 부활했는지 사실 나는 알 수 없다. 몸의 부활을 했다고 해도, 휙 사라지시기도 하는 것으로 보아,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신 것 같다. 하지만 어차피 확인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한 가설을 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신학자가 아닌 신앙인으로서의 나에게 중요한 것은, 어떠한 형태로든 다시 사셔서 내 곁에 계시는 예수님을 알아차리고 만나는 것이다. 내 생각, 사건의 순서와, 의문에 골몰하는 대신, 예수님의 부활을 내가 경험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경을 인용하며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다시 설명하고, 집에 머물고 가라는 이야기에 같이 집에서 식사까지 해주신다. 그리고 그제야, 제자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본다 (눅 24:31). 그리고 예수님은 사라지신다. 혼자 있기보다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주님께서 눈을 열어주실 때에 부활의 은혜와 기쁨을 경험할 수 있나 보다. 부활을 믿을 수 있는지, 믿을지 말지를 생각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지금부터는, 좋은 교제를 나누고 내 눈을 열어달라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싶다. 내 옆에 계속 계셨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주하는 기쁨을 누리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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