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명 남았다
의대 오리엔테이션까지 2주가 남았다. 오늘 확인해 보니, 23명까지 들어갔다. 2명만 우리 동네 의대를 포기하면, 나에게도 기회가 온다. 하지만 지금 누군가가 의대 입학을 갑자기 포기하거나 다른 학교의 합격 소식을 받고 그 학교로 가겠다고 할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괜히 확인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앞에서 끊긴다면, 엄청난 트라우마가 될 것 같다. 확인하지 말아야겠지...
누군가가 날 뒷바라지 해준다면 내가 더 잘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남편은 가장의 역할을 묵묵히 해주었고, 그래서 그나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아주 확실히 안다. 좋은 결과를 냈던 나의 친구들은 넘사벽으로 똑똑한 것이었고, 나는 아마 물심양면의 지원을 받았더라도 그 정도의 결과는 아니었을 거라는 걸.
사실 과거를 돌아볼 여력도 없다. 이젠 미래로 나아갈 때. 남편의 뒷바라지를 더 받아서, 먼 의대에 진학하고, 남편의 지금까지의 수고를 헛되지 않게 할 것인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내가 정신 차리고, 객관적으로 나보다 똑똑하고 성실한 남편을 뒷바라지하고, 아이들 잘 키우는 데에 집중하는 게 나은 게 아닐지, 하는 생각도 든다. 누군가가, 이민은 한 세대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했었다. 나는 희생하고 싶지 않았다. "다 너를 위해서야"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가족 간에서도, "너를 위한" 희생이 있나? 사람은 대부분 인풋이 있으면 아웃풋이 있기를 원한다. 너를 위해서라 하지만, 나를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서, 아이 낳는 것을 미루고, 다른 나와 비슷한 사람이 가지 않는 길을 선택해서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나를 고립시키면서 까지, 이 길을 지지부진하지만 계속 걸어왔다.
간호대를 선택하면 모두가 행복하다. 내가 합격한 먼 의대를 가려면 집을 팔거나 이 낡은 집을 렌트를 주어야 한다. 아님 롱디 부부가 되어야 한다. 집을 팔자니, 지금은 집 팔기에 최악의 타이밍. 렌트를 주자니, 이 낡은 집이 더 손상될 수도 있고 누가 이 낡은 집에 살려고 할지도 모르겠다. 직장에서는 남편 프로젝트도 한창 진행 중이며 재택 기회는 없을 것. 직장 자체가 요즘 분위기가 좋지 않아 재택이 허용되는 팀이 있을지도 모르고 된다 하더라도 이동이 될지도 모른다. 남편이 좋아하고, 안정적인 이 직장을 포기하면 생계에 변화가 생길 수도 있다. 근데 우린 두 명의 아주 어린 딸들이 있다. 그냥 삽질 실컷 했다고 인정하고, 너는 머리가 안된다고 했던 사람들의 말도 그냥 인정하고, 불효녀였던 것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지금이라도 간호대에 다시 가는 것이 맞나 하는 생각도 든다. 아이들에게도 말하기도 좋을 것 같다. 공부 적게 하고 돈 빨리 버는 직장이 최고다, 엄만 그걸 몰라서 아주 헤맸었다, 늦었지만 그래도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너희와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있었다, 너희라도 빨리 돈 벌고 안정되어 결혼도 빨리 하고 아이 얼른 낳아라. 너희가 출산을 너무 늦게 하면 엄마가 산후조리를 도와줄 체력이 안될 수 있으니 빨리 직장 잡고 돈 벌고 네가 자립해서 좋은 사람 만나는 게 현명한 결정이다. 이런 초현실적인 엄마가 될 수 있다. 게다가 간호 일은 인공지능이 대체하기 훨씬 어렵다.
내가 이번에 먼 의대에 가면, 솔직히 나중에 내 딸들이 나 같은 서포트가 많이 필요한 남편 만난다고 할 때 말릴 명분이 없을 것 같아서 걱정이다. 뭐 성인 남녀가 좋아서 한다는 결혼을 말릴 명분은 당연히 없겠지만, 혹시 아이들이 나 같은 배우자를 데려올까 무서운 것도 사실이다. 이 정도면 답이 나온 건가? 근데 포기하기가 아쉽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으니까. 게다가 이 선택도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한 삽질의 시간을 보낸 후 어쨌든 결과가 있으니, 난 시간 낭비한 것만이 아니게 된다. 그럼 나에 대한 자존감은 더 올라갈 것 같다. 수많은 삽질 끝에 그래도 뭔가 이뤘다는 성취감. 아이들에게도 목표가 있으면 아무리 그 목표가 커 보여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하다 보면 좋은 결과가 있다고 말해줄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꿈을 이루는 여성의 본을 보인다는 면에선 좋을 거 같다. 하지만 아이들은 날 엄마로서 존경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못 보내서.
그래서 동네 의대를 너무 가고 싶었다. 너무 가고 싶은 거치곤 전략이 부족했고 노력보단 걱정을 한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긴 하지만. 적어도 이사를 가지 않아도 되니 집 문제나 남편 직장 문제나 많은 괴로움이 해결된다. 아이들 케어도 더 용이할 것 같고. 과연 2주 안에 2명이 입학을 포기할까? 지난 몇 주간 22번에 머물러있었던 걸 생각하면 내가 들어갈 가능성은 적고, 내 앞에서 끊길 가능성은 높다. 특히 내 앞에서 끊긴다면... 한동안 후회에 잠식되어 매우 우울할 것 같다. 상담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쓰고 보니 아무래도 먼 의대 선택은 장점은 뚜렷하지만 단점이 너무 많다. 동네 간호대 선택은 장점은 아주 많고, 단점이 너무 뚜렷하다. 내 꿈과 노력을 부정하는 것. 희생 없는 사랑, 희생 없는 성취는 없는 거 같다, 특히 엄마에게. 나의 희생을 담보로 남편과 자식에게서 성취를 요구하고 그걸로 대리만족 하는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민자 엄마로서, 그게 답인 걸까? 언어나 문화에서 훨씬 나보다 이점을 가진 이민 2세 남편과 아이들에게 나의 노력을 투자하는 것이, 이미 글러버린 것 같은 나로서 살아남고 적응하기 위한 최고의 선택일까?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