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톨이로는 만들지 말아 줘.
43. 승기의 놀라운 임기응변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전화를 끊은 승기 역시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듯하다. 당황한 기색은 역력하다. 스피커폰으로 통화했기에, 나를 포함한 직원 모두는 일순간 얼음이 돼 동작을 멈춘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승기는 임 대표에게 전화한다. 그리고 급하게 사무실을 떠난다.
“김 팀장을 통해 보고 받았습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프로젝트는 안정적으로 운영 중입니다. 계획대로 부자들의 지갑은 순조롭게 열리는 중입니다. 그래요, 너무나 잘 풀리는 상황이라 지루하다고 할까요?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졌네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합니다. 이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검증 없이, 상대방을 맹목적으로 폄훼하는 세력은 당연히 예상했던 일입니다. 이것도 공격이라면 공격일까요? 그런데 타격감은 전혀 없어요. 시시합니다. 실망스럽네요. 그 정도의 공격으로 우리가 무너지겠습니까? 블루 고스트와 카테난조는 그리 허술한 집단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기자가 하는 말은 그저 낭설[243]입니다. 떠도는 낭설. 기자와 조만간 자리를 가지기로 했습니다. 곧 속내[244]를 알 수 있겠지요. 걱정하지 말고 본업에 집중하세요.”
임 대표가 웃으며 말한다. 별 것 아니라면서. 임 대표의 웃는 모습은 오래간만이다. 임 대표의 굳건한 모습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숨을 내쉰다. 기자 전화 한 통이다. 딱 한 통의 전화로 사고의 마비는 완벽하게 일어난다. 오죽하면, 엄지발가락까지 뻣뻣해질까? 우리는 카테피아의 완성만 생각하며 정말로 열심히 일한다. 전면적으로 나서서 투자자를 모집하는 카쿠르터 영업팀, 카쿠르터와 사무실 직원 근태 관리를 책임지는 인사총무팀, 김 팀장과 머리를 맞대며 카테피아를 실현하려는, 야근이 일상이 된 기획전략팀, 투자자의 이탈을 방지하고 충성도를 높이기 위한 고객 관리팀, 그리고 모든 부서를 총괄 관리 및 지시하는 임 대표. 우리는 쉬지 않는다. 우리는 열정적이다. 우리가 진행하는 방향은 바르다고 믿는다. 바른 방향이기에 많은 이가 인생 2막의 기회를 쟁취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도 전화 한 통에 단단한 믿음은 삽시간에 무너진다. 믿음의 경도가 다이아몬드라 생각했는데, 플라스틱보다도 약한 유리였다. 왜 이런 일은 일어날까?
깨진 그릇을 이어 붙여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44. 기자와의 통화는 내 업무였다. 고객 관리는 내 역할이다. 승기가 대신 전화를 받아 관리 능력의 부족함이 드러나는 게 문제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사무실에 있는 모든 직원은 알고 있다. 승기의 업무 능력이 훨씬 낫다는 사실을. 임 대표는 승기와 상의 후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어차피 난 고객관리팀 아닌가? 서운해도 당연하다. 승기는 전략기획팀이니까. 다만, 사무실 직원은 임 대표가 더는 나와 기밀 사항을 나누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른다. 전화 통화에서 보여준 당혹함으로 그동안 프로젝트 진행에 의심을 하였던 직원은 확신이 선 것 같다.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임 대표가 수습에 나섰다. 곧 해결하리라 믿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의심만 있을 뿐, 받쳐줄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나쁜 일에 엮었다고 생각지 않는다. 블루 고스트는 신이다. 더는 의심하지 않는다. 반신반의[245]하는 직원도 곧 깨닫게 될 거다.
그래, 난 나쁜 일을 하지 않는다.
그래, 난 나쁜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래, 난 나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 난 착한 사람이다.
승기와 기자를 만나러 가는 중이다. 임 대표가 직접 나설 일은 아니라 승기가 판단한 것 같다. 아니면, 임 대표를 대변해 전할 말이 있을지도 모른다. 승기와 임 대표가 무슨 대화를 했는지 모른다. 굳이 따라갈 이유는 없다. 할 이야기도 없다. 거절했다. 승기 혼자 가라고. 내가 가서 뭐 하냐고.
“효상아, 같이 가자. 그만 겉돌고 함께해야지.
우리는 하나니까. 그리고 네게 할 이야기도 있고.”
45. 오랜만에 보는 표정이다. 강변역 포장마차에서 나를 다그치며 보였던 그 표정이다. 그래, 겉돌고 있다는 게 현재의 내 처지다. 임 대표에게 먼저 다가가, 그동안 블루 고스트와 너를 오해해 미안하다고 말해야 했었다. 그런데 또 먼저 다가가 말하는 게 싫다. 정말 한 번만 임 대표가 먼저 다가와 풀어주면 좋을 텐데. 이미 사과할 준비가 끝났는데. 우현이는 다가오지 않는다. 대표라면 응당 직원을 먼저 살펴야 한다. 글러 먹은 용인술이다. 그리고 그냥 직원도 아니다. 임 대표와 가장 친한 친구다. 하지만, 이미 임 대표의 마음은 떠난 듯 보인다. 승기는 임 대표가 여전히 우리를 예전처럼 대한다고 하지만, 잘 모르겠다. 적어도 나한테는 아니다. 글러 먹은 용인술이다. 겉돌고 싶지 않다. 내가 잘못했다고. 기자와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없지만, 다른 기대를 한다.
“안녕하세요, 유선상으로 인사했던 전력기획팀의 김승기입니다. 그리고 옆에는 인사 팀장인 안효상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번에 통화한 ○○의 ○○ 기자입니다. 생각보다 이른 만남이네요. 이렇게 바로 만날지는 몰랐어요.”
“속전속결[246]입니다. 시간 끌 거 뭐 있습니까? 원하는 것을 말씀하세요.”
승기는 날카로운 말투는 오늘도 거침없다.[247]
“김 팀장님, 훅 들어오시는군요. 바로 본론이라니. 제가 원하는 것은 진실입니다. 소문에 진실. 그것 말고 바라는 게 또 뭐가 있을까요?”
“기자님, 정말로 바라는 게 진실입니까? 그것 말고는 바라는 게 정말로 없나요?”
“도통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감이 잡히지 않네요. 팀장님이 먼저 말씀하세요. 무엇을 주고 싶은지. 그것을 듣고 고민하겠습니다.”
46. 문이 열린다. 바닷가의 향을 머금은 신선한 음식이 들어온다. 개인적으로 해산물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비린내가 싫어서다. 어른이 되면, 좋아하는 음식도 변한다고 한다. 그럴 줄 알았다. 어른이라면 해산물을 대부분 좋아한다. 신선해서? 건강해져서? 비싸서? 아니면 정말로 맛나서?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시간이 흘러도, 떡볶이, 김밥, 짜장면, 라면, 돈가스는 여전한 최애 음식이다. 비린내 나는 해산물보다. 어른이 되면서 변하는 주변인의 입맛은 나를 슬프게 한다. 나만 그대로여서다. 승기도 임 대표도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더는 좋아하지 않는다. 도대체 분식점 음식을 왜 싫어하는데? 먹자고 이야기도 안 꺼낸다. 하긴, 승기는 원래 싫어했다. 하지만 우현이는 다르다. 대학교 때, 그렇게나 즐겨했으면서. 입맛이 변하면 사람도 변하는 건가?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건가? 그래서 나를 싫어하나? 그렇다면 난 왜 그대로인데? 내 입맛은 왜 변하지 않는 건데? 한상 거나하게 차려진 해산물이 더욱더 미워진다. 안 먹는다. 오늘도. 넌 나쁜 음식이다. 나와 우현이를 이간질하니까. 나쁜 놈!!
“기자님, 저희가 조사한 게 있는데요, 요즘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요.”
“제가요? 그런 사실 없습니다.”
“서로 솔직하게 패를 보이고 좋은 방향으로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김 팀장님, 도통 무슨 소리 하는지 알 수가 없네요. 빙빙 돌리지 마시고, 말씀하세요.”
승기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사진이다.
“처음에는 취재차 이곳에 들른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게 아니더군요.”
“설마 저를 미행했습니까?”
“미행만 했을까요? 더한 것도 이미 했습니다. 판단이 끝났으니 기자님과 만남을 청했지요. 카테난조의 정보력을 무시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김 팀장님, 정말로 무서운 사람이군요. 전 단지 제보에 관련해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을 뿐입니다.”
승기가 꺼낸 사진을 보고 있지만, 평범한 술집으로 보인다. 그런데 기자는 당장이라고 울 것 같은 표정을 진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냐?
“보이는 진실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기자님은 사실과 다른,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진실로 포장해 삶을 살아가고 있더군요. 숨겨 놓은 사실을 주변인이 알기를 원합니까? 그러기를 원하면, 지금 전화 한 통으로 가족을 포함해 기자님 주변인에게 사실을 전달하겠습니다. 그러기를 원하세요?”
“김 팀장님, 본성을 무시한 채, 제 인생을 힘들게 쌓았습니다. 설사 그게 거짓이라도, 쌓아온 진실을 난 사랑 합니다. 제발 그러지 말아 주세요.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47. 기자와 승기는 나만 모르는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목적어가 빠진 대화를 듣고 있는 삼자 입장은 참 답답하다. 태세전환이다. 기자는 꼬리를 내리고 간절함이 녹은 애원의 눈빛을 보낸다. 승기에게 자신의 구원을 갈구한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승기의 승리다.
“카테난조는 기자님을 해하려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대상이 누구든지 원하는 바를 찾아서 인생 2막의 기회를 제공하려고 합니다. 협박으로 원하는 바를 취하는, 삼류건달 양아치 집단은 아닙니다.”
“원하는 것? 저조차도 모르겠습니다. 당장은 저의 비밀을 누구도 알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건 당연한 일입니다. 발설할 생각이라면, 이처럼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노래 실력이 상당하더군요. 쇳소리를 머금은 애달픈 목소리가 구슬퍼 듣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호소력이 짙은 목소리입니다.”
“부끄럽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니 감사하네요. 위태로운 사생활을 알고 있는 자와 대면한 게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조금은 느낄 수 있는 노래였습니다. 맞습니다. 기자님의 목소리는 한마디로 위태로운 사생활입니다.”
“김 팀장님, 그러면 어찌하면 좋을까요? 이것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답답한 현생에서 이마저 없다면, 저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차라리 위태로운 사생활을 공개하는 게 어떠세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게 한꺼번에 무너질 게 뻔합니다. 저는 제 삶을, 사랑하는 것을 지키고 싶습니다.”
“만약 위태로운 사생활을 공개해도, 당신의 삶을 지킬 수 있다면? 어찌하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그게 가능한가요? 가능하다면, 정말로 김 팀장님이 말씀한 인생 2막의 기회가 열릴지도 모르겠네요.”
“곧 다시 연락하지요. 그때까지 카테난조에 관련해 어떠한 기사도 내지 말아 주세요. 아시겠죠?”
to be continued....
[243] 낭설 (浪說): 터무니없는 헛소문.
[244] 속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속마음이나 일의 내막.
[245] 반신반의 (半信半疑): 반쯤은 믿고 반쯤은 의심함.
[246] 속전속결 (速戰速決): 일을 빨리 행하여 속히 끝냄.
[247] 거침없다: 일이나 행동 따위가 중간에 걸리거나 막힘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