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죄와 벌’은 매우 유명한 소설이고, 아마 너도 읽어 봤을 거고(청소년용이라도. 아니라도 내 글을 읽는데 별 문제는 없을 듯.), 이 글은 소설을 소개하는 글도 아니기 때문에 소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다. 바로 내가 떠올렸던 생각으로 가보자.
소설의 중반에는 안드레이 세묘노비치 레베자트니코프(당연하게도 명기하기 위해 나무위키를 참조해야 했다.)가 등장한다. 소설 내에서는 뭐 중요하다면 중요하고 안 중요하다면 안 중요한 사람이다. 한국 영화로 치자면, 그 영화가 대작일 경우에, 박지환 씨가 맡을 정도의 비중이 있는 캐릭터다. 물론 나이와 이미지가 안 맞아서 박지환 씨가 맡기는 어려울 거다. 박지환씨는 범죄 도시에서 장이수로 나오는 배우다. 어쨌든 이 캐릭터, 세묘노비치는 소설의 악역 표트르 페트로비치 루진(이 또한 나무위키 참조했다. 읽은 지 시간이 좀 지나서.)가 단죄되는 상황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캐릭터이다. 세묘노비치가 루진의 얕은 모략을 대중에게 공개하여 소피아를 구하고 루진에게 망신을 준다.
나는 ‘죄와 벌’을 처음 읽은 것이기에 이런 사건이 후에 발생하는지는 전혀 모르고 책을 읽고 있었다. 중반에 세묘노비치가 처음 등장했을 때, 작가는 세묘노비치를 소개하기 위해서 꽤나 긴 분량의 루진과 세묘노비치의 대화를 삽입했다. 세묘노비치는 열정적이지만 멍청한 사회주의자, 폭로주의자다(내가 이해하기로 폭로주의는 당대 제정 러시아의 노동자들의 비참함을 사회 문제화 시키는 데에 방점을 둔 사조다. 도스토옙스키는 폭로주의의 대표격이다.). 루진은 냉소적인 변호사다. 작가는 세묘노비치와 루진의 대화를 통해 세묘노비치를 비웃는다. 세묘노비치는 본인이 정열적으로 설파하는 결혼에 대한 사회주의적 시각(작중에선 일부일처 결혼제도의 폐지를 방점에 둠.)에 대해 루진이 성적인 농담으로 조롱하자 이를 제대로 반박하지 못하고 우스꽝스럽게 화만 낸다. 또, 소설 속 절대자인 서술자도 그가 사회주의적 이론을 완전히 숙지하지 못했고, 그 단체에 속해 있다는 것 자체를 자랑으로 생각하는 멍청한 추종자 중 한 명이라는 듯 그를 설명한다.
내가 생각하는 멍청한 추종자는 이런 특징이 있다.
첫 번째, 어떤 사상적인 깊이가 있는 사상을 추종해야 한다. 그 예로는 종교, 정치적 프로파간다(사회주의, 자유주의, 파시즘 등), 사회분석적 시각(페미니즘, 아나키즘 등), 학문 분야 등이 될 수 있겠다.
두 번째, 그 사상에 대한 거의 맹목적인 믿음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신념이 도전받았을 때 그 신념을 쉽게 수정하는 사람은 멍청한 추종자의 유형이 아니다.
세 번째, 적극적으로 사상을 접하고 탐독해서 사상이 대중적으로 선전하는 논리에 대해 친숙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자유주의(고전파)가 대중적으로 선전하는 논리는 ‘자유로운 시장이 효율성을 만든다.’(좀 더 대중적으로는 ‘자유로운 시장은 좋다’ 일 듯. Free market is good.)이다.
네 번째, 위에 조건들을 만족하지만 지식의 수준이 깊지 않아서 본인의 사상에 대한 도전에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다. 그 수준이 깊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될 수 있다. 당연한 것이라 생각해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다든가, 사상을 깊이 배울 기회가 없었다든가, 사상을 소화할 지적 능력이 부족할 수도 있다.
내가 분류의 이름에 ‘멍청한’이라는 말을 붙였다고 해서 실제로 이 유형의 모든 사람이 지적 능력이 떨어진다고 보는 것이 아니다. 어떤 분야에서의 지식인이 어떤 분야에서는 멍청한 추종자인 경우는 굉장히 많다. 또 혹자가 말하는 것처럼 지적 허영심이 멍청한 추종자의 필요충분조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필요조건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지적 허영심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특성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런 멍청한 추종자 유형은 현재도 굉장히 많다. 아마도 현대 한국이 19세기 제정 러시아 보다 교육받은 인구가 훨씬 많기 때문에 소설 속의 시간보다 지금 더 많을 것이다. 멍청한 추종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 사상을 완전히 숙지하진 못하지만 사상에 노출은 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은 것은 멍청한 추종자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멍청한 추종자를 더 잘 설명하기 위해서 짤막한 에피소드를 구성해 보자. 지구 평평론자 vs 지구 둥글론자(천문학자들은 이 쪽 진영에 속해있다.)의 토론이다. 지구 둥글론자 진영에서 멍청한 추종자 유형의 한 인물이 출전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지구 평평론자야. 내가 지구가 둥근 이유를 설명해 줄게. 잘 들어. 이게 과학이야. 너가 해변가에 가서 배를 보고 있잖아? 그러면 배가 앞으로 쭉~ 가다가 어느 순간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일 거야. 그게 지구가 둥글다는 증거야. 지구가 둥그니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거라고. 잘 모르겠으면 농구공으로 실험해 볼 수도 있어.”
출전한 지구 둥글론자는 뿌듯하다. 자기가 과학 시간에 들은 설명을 거의 그대로 재현하는 데에 성공했다. 대부분의 경우(특히 어린아이들에게 설명할 때에)에는 상대가 “아 그렇구나.” 혹은 “그렇지. 그게 상식이지.”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안타깝게도 그런 상황이 아니다.
지구 평평론자가 반박한다. “지구 둥글론자야. 그건 사실이 아니야. 가시광선 굴절 현상이라고 알고 있니? 너가 물에다가 젓가락을 넣으면 휘어지는 것처럼 보이잖아. 그런 현상이 공기 중에서도 일어나는 거야. 가까운 거리일 때에는 매질의 차이가 적기 때문에 굴절이 적게 일어나서 우리가 느낄 수 없지만 배가 충분히 멀어지면 그 굴절이 충분히 많이 일어나서 배의 밑부분부터 바다에 가려지는 거라고.”(실제 지구 평평론자의 논리는 아닐 수 있다.) 물론 이는 조금 더 사상(이 경우에는 과학)을 깊이 아는 사람은 반박할 수 있는 도전이지만, 멍청한 추종자 유형은 이러한 도전에서 자신의 사상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다.
멍청한 추종자들에 대해 말할 때, 특히 조롱되는 부분은 본인의 사상이 공격받았지만, 그것을 방어할 능력이 없을 때에의 멍청한 추종자들의 반응이다. 이런 조롱은 통시적으로 꾸준히 존재했던 걸로 봐서 실제로 좀 우스운 꼴이긴 한 모양이다. 울그락불그락, 부들부들 이런 단어들이 그런 조롱에 쓰인다. 매체에서는 주로 화를 내는 걸로 그 반응을 정형화해서 다룬다. 아마 이는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 가장 우습기도 하고, 외적으로 잘 표현되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론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반응하진 않는다. 물론 화를 내는 사람도 있고, 대화를 그만두고 자신의 사상을 마음속으로 정당화하면서 자리를 떠나는 사람, 자신의 대중논리를 반복하면서 사실은 논리적 반박이 되지 않았지만 논리적 반박이 되었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 자신의 논리에 도전한 사람을 대화를 나눌 수준이 맞지 않는 사람으로 치부하는 사람 등등. 그런 상황에 대해 대응하는 방식은 사람들마다 매우 다르고, 이는 아마 단순히 사람들의 성격적 차이에서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매우 다양한 종류의 사상의 멍청한 추종자들에게서 매우 다양한 방식의 반응이 나오기 때문에 특정한 반응 양태가 사상의 특성에 기인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런 분류를 하는 것만 해도 참 재밌는 일이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쉽게 적용시켜 볼 수도 있고 내가 어떤 부분에서 멍청한 추종자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멍청함은 연속적인 측도이기 때문에 기준을 넓게 잡으면 세상 사람들의 대부분이 멍청한 추종자 분류에 들어갈 수도 있다. 따라서 어느 정도로 사상에 대해 깊이 알아야 멍청함을 벗어나는 건 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도 재밌는 생각거리일 것이다. 이 세상에 사상은 무수히 많고 멍청함은 연속적이기 때문에 무한한 조합이 나온다. 끝도 없이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생각거리의 장점이다. 또, 멍청한 추종자 무리들을 어떻게 하면 잘 놀리고 골탕 먹일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아니면 내가 멍청한 추종자 무리의 일원이 되지 않기 위해서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갖추어야 할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멍청한 추종자 주제는 이야기할 거리도 많고 다방면으로 흥미로운 주제다.
하지만 이번 글에서 멍청한 추종자 주제의 백미는 이것을 매체에서 다루었을 때 나타나고, 더 깊게 생각할 수 있게 해 준다. 다시 ‘죄와 벌’로 돌아가자. 처음 세묘노비치에 대한 소설의 조롱을 읽었을 때에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이런 사람들이 당시 19세기 상트 페테르부르크에도 많았을 텐데, 본인의 추종세력이라고 볼 수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조롱할 수 있었을까? 도스토옙스키는 참 하고 싶은 말은 해야 하는 사람인가 보다. 할 말은 한다. 도카콜라! 도카콜라가 지금 한국에서 살고 있어도 이렇게 대놓고 조롱하는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렇게 한다면 추종자들의 숱한 비난을 받고 매장당하지 않았을까?’
나는 이 생각을 할 때에 아직 세묘노비치가 영웅적인 타이밍에 소피아를 구해내는 파트에 다다르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더욱 들었다. 세묘노비치가 소피아를 구해내는 에피소드가 뒤에 배치되어 있다는 걸 알아서, 세묘노비치가 단순히 조롱당하기 위해 나온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면 위와 같이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생각이 좀 정리되니 다른 결론에 이르렀다. 도카콜라가 세묘노비치를 멍청한 추종자로 등장시키고 뒤의 영웅적인 에피소드를 넣지 않고 오직 조롱만 했다고 해도 그가 자신의 추종자로부터 비난받고 매장당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19세기 러시아에서 뿐 아니라 지금의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왜 그런지는 다음 글에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