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청함에 대하여 (2)

by 장우성

왜 도스토옙스키는 멍청한 추종자에 대한 조롱을 거리낌없이 할 수 있었나? 대부분의 멍청한 추종자는 자기가 멍청한 추종자인지 모른다. 따라서 누군가 멍청한 추종자를 조롱한다면, 사람들은 자신이 조롱당했다는 것에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조롱의 대열에 합류해서 자기 머릿속의 다른 어떤 멍청한 추종자를 조롱한다. 이건 단지 멍청한 추종자 집단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재미있게도, 많은 사람들은 ‘멍청함’ 혹은 ‘능력 부족’에 대한 조롱, 비난, 멸시 등이 자기 자신을 향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행위를 비난했을 때와 멍청함을 비난했을 때는 보는 사람들의 받아들이는 방법이 다르다.


예를 들어보자. 인터넷 커뮤니티에 어떤 게시글이 올라왔다. “아 직우차선에서 우회전 기다리는데 뒤에서 재촉하는 애들 좀 어떻게 하면 안 되냐?”(운전을 해봤다면 알겠지만, 굉장히 흔하게 있는 일이다. 특히 서울 시내 운전을 할 경우에는. 안 재촉하는 게 맞다.) 이 글의 댓글의 대부분은 비슷한 불쾌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모여서 비난을 공유하는 장이 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댓글들 분위기 상 댓글은 못 달았지만,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이 글을 보고 ‘우회전할 수 있게 정지선 지나서 좀 앞으로 나가주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구체적인 행위가 들어가면 본인이 그 비난의 대상이 되는지를 알기 쉽게 된다.


하지만 좀 다르게 표현한 글은 양상이 다르다. “운전 빡대가리처럼 하는 사람들은 좀 차 팔고 대중교통 타면 안 되냐?” 이 글의 댓글은 빡대가리 운전자에게 피해를 받은 사람들의 만남의 광장이 된다. 이 글을 보고 자기 자신이 빡대가리 운전자라며 반성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물론, 빡대가리 운전자라는 비난을 친구에게 숱하게 들은 사람은 잠시 자기반성을 할 수도 있겠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언젠가 만난 진짜 이상한 운전자를 떠올리며 ‘그런 애들 때문에 운전이 어렵다니까.’라고 생각한다. 비록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실제로는 누군가에게 빡대가리 운전자임에도 그렇다.


정리하자면, 사람들은 멍청한 사람을 놀리는 콘텐츠에 화내지 않는다. 왜냐? 본인은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왜 세상에는 멍청이를 욕하는 사람만 있고 멍청이는 없는 걸까? 멍청이라서 자기가 멍청이인걸 모르는 걸까? 그런 것도 없지는 않겠지만, 내 생각에 더 중요한 요인은, 세상에 사람은 많고 멍청함 척도는 연속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멍청함은 한 가지 차원에서만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차원에서 측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멍청함의 척도가 연속적인 것은 자명해 보인다. 세상 사람들은 멍청한 사람과 안 멍청한 사람으로 나뉘지 않는다. 멍청함의 정도는 연속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하지만, 멍청한 사람과 안 멍청한 사람이라는 분류는 불연속적(이산적)이다. 따라서, 어떤 나름의 기준점보다 덜 멍청하면 안 멍청한 사람, 더 멍청하면 멍청한 사람이 된다. 하지만 그 기준점은 각자 생각하기 나름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본인이 멍청한 쪽에 들어가도록 기준점을 두지 않는다. 따라서 추상적으로 ‘멍청이’라고 하면 본인을 포함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본인의 ‘멍청의 기준점’보다 멍청한 사람은 항상 수도 없이 있기 때문에, 항상 멍청한 사람을 찾을 수 있다. 이런 멍청 척도계는 내적완결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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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스스로를 멍청이라고 느끼지 않는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멍청함의 정도는 지금 무슨 일과 관련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한 사람이 운전에서 멍청이라고 해서 도시경제학에서도 멍청이라는 법은 없다. 또한, 도시경제학의 멍청이가 운전에서는 멍청이가 아닐 수 있다. 같은 문장을 두 번 반복한 것은 운전과 도시경제학 사이에는 우열이 없다는 걸 말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은 자기가 관심이 있는 분야에 자신의 시간과 정성을 더 쏟는다. 또한 자신이 자신 있는 분야에서, 그 사람은 인간 평균보다 덜 멍청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은 시간은 멍청이가 아닌 상태로 살게 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멍청이가 아니라는 ‘인상’을 갖게 된다. 자신의 멍청함이 더 높은 분야에 있을 때에도 본인은 멍청이가 아니라는 ‘인상’은 유지된다.

나의 분야별 멍청의 정도

두 가지의 기전을 합쳐보면, 멍청의 기준점은 자율적으로 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성적으로도 자신을 멍청이에서 제외할 수 있다. 또한, 사람들은 보통 멍청이가 아닌 상태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따라서 본인이 멍청이가 아니라는 인상을 갖게 된다. 결론적으로는, 사람들은 생각으로도 기분으로도 본인을 멍청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


내 의견엔 본인이 멍청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나 자신도 스스로 멍청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본인을 멍청이라고 생각하며 자기 비하를 하며 사는 것은 유쾌하지 않은 일이다. 또, 본인이 멍청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그렇게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도 아니다. 보통, 피해는 멍청하기 때문에 일어나지 스스로 멍청이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건 아니다.


안타깝게도, 본인이 멍청이가 아니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환경에 놓여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내가 만난 중고등학생들이다. 중고등학생들은 앞에서 말한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하지 못하는 환경에 놓여 있다. 우선, 학생들은 시험을 볼 때마다 성적, 등급을 받게 되고 자신이 공부에서의 멍청 수직선 위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명확하게 알게 된다. 또한, 멍청이의 기준(이 경우엔 우등생과 열등생으로 나뉨)도 누군가(학부모, 친구들, 인터넷 커뮤니티, 교사 등)가 만들어 놓은 기준을 사용하게 된다. 그리고 그 기준은 애석하게도 다수의 학생들이 통과하기에는 다소 높다. 학생들은 멍청자기방어권을 행사해내지 못하고, 스스로를 멍청이로 분류하게 된다.


또한, 학생들은 반강제적으로 생활의 대부분을 공부에 투자하게 된다. 공부는 그 본래 성격상, 하고 있으면 본인이 멍청이처럼 느껴진다. 모르는 것을 반복하고 그것이 숙달되면 더 이상 그 내용은 안 보기 때문에, 공부하는 대부분의 시간은 뭔가를 모르고, 비숙련된 상태로 있게 된다. 이에 더해서, 어른들은 상세히 분화된 직업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본인의 직업에 한해서는 평균적인 주변 사람들보다 안 멍청할 확률이 높다. 하지만, 학생들은 주변의 친구들이 모두 비슷한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에 평균적인 주변 사람들보다 멍청할 확률이 높다. 따라서 생활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본인이 멍청하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나는 과외를 꽤나 많이 해봤고, 학창 시절도 친구를 많이 만나며 보냈으니 학생들을 많이 만나봤다. 학생들은 어른들에 비해서 자기 스스로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매우 많다. 기죽어 있는 모습을 보면 안쓰럽다. 당신은 멍청이가 아니라고 말해 봤자 내가 말하니 별로 소용이 없었다. 아 예 뭐 그렇게 생각하시겠죠. 이런 식이었다. 또 파크골프장에서 자기는 절대 멍청이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어른들도 많이 봤다. 당신은 멍청이라고 할 수가 없으니 살짝 고까웠다. 언제나 마지막으로 도달하기에 아름다운 적당한 결론으로 다다랐다. 본인이 너무 멍청이라고 생각하지 말되, 본인이 멍청이일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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