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람들은 ‘하는 내 모습’에 취해있다. ‘독서를 즐기는 멋진 나’, ‘우울증에 걸린 멋진 나’의 모습을 위해 독서를 즐기지 않으면서, 우울하지 않으면서 그런 척한다.”
많이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인스타그램에서 책의 한 페이지를 펴놓고 마음에 드는 글귀에 밑줄을 친 사진을 올리고 밑에 그 글귀에서 나온 감성에 젖은 감상을 적은 게시물을 보고 있자면 위와 같은 말이 허공에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특히 그 게시물을 올린 사람이 절대 그 책의 전부를 읽지 않았을 것 같을 때 좀 더 선명하게 들린다.
앞으로 논의의 편의를 위해 ‘~~ 하는 내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을 ~~ 모습애호가라고 부르자. ~~ 모습애호가는 ‘남에게 보이는 내 모습’ 혹은 ‘내가 보는 내 모습’을 위해서 비록 그렇게 하고 싶진 않더라도 ~~ 하게 된다. 독서모습애호가는 ‘내가 보는 내가 독서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거나 ‘남이 내가 독서하는 모습을 보는 것’ 혹은 ‘누군가가 바라보는 내 독서하는 모습’을 좋아한다. 물론 둘 다 좋아할 수도 있다. 우리 주변에는 수도 없이 많은 종류의 모습애호가들이 있다. 부자모습애호가, 독서모습애호가, 레즈비언모습애호가, 우울모습애호가, 홍어애호가모습애호가 등등.
독서모습애호가들은 그래도 모습애호가 들 중 어느 정도 대접이 나쁘지 않은 편이다. 상대를 독서모습애호가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저렇게라도 한 줄씩 읽는 게 도움이 되기도 하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 상대가 실제로 독서모습애호가라고 할지라도 나에게 크게 불편함을 주지도 않는다. 너무 자랑하거나 나에게 독서의 아름다움을 강하게 전파한다면 좀 눈꼴시리긴 하겠지만, 세상에 눈꼴 시려운 일이 한둘도 아니고, 그 정도는 애교로 넘어가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모습애호가들 중에서도 처우가 안 좋은 모습애호가도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우울모습애호가다. 일단 ‘우울모습애호가’라는 분류의 사람들이 실존한다는 것에 대해서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우울증에 걸리는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유구한 역사 속에 존재해 왔고, 특히 유럽 낭만주의의 유행 이후에는 우울에 대한 선망이 지나치게 커지기도 했다. 또, 실제로 우울한 사람은 좀 멋있기도 하다. 이상적으로 생각했을 때, 우울의 이미지는 존재에 대한 고뇌, 예술적 창조성의 발현의 이미지와 겹친다. 인간 실존에 대해 고뇌하는 예술가. 얼마나 멋있나. 19세기 유럽에서 결핵, 폐병이 위와 같은 이미지를 얻어서 낭만화되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알렉상드르 뒤마는 결핵에 걸리지 않았지만 그 이미지를 선망해 결핵에 걸렸다고 말하고 다녔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니까. 아픔과 예술성은 쉽게 연결되기에 예술가의 이미지를 동경하는 사람이 우울모습애호가가 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만한 일이다. 구체적으로 아픔과 예술성이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자. 내가 잘 모르기도 하고, 내가 아는 정도의 이야기만 해도 너무 길어질 것 같다.
다시 우울모습애호가의 처우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와서, 우울모습애호가의 처우가 안 좋은 것도 아주 이해할만하다. 첫 번째로, 우울모습애호가가 아닌 사람이 보았을 때, 우울모습애호가로 사는 건 좋을게 하나도 없다. 사람들이 얼마나 긍정적이게 되려고 노력하는지 알 것이다. 동기부여 전문가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삶의 태도에 대해 말할 때 항상 말하는 게 긍정 아닌가. 자신의 상황을 꾸밈없이 직면해야 한다는 비낙관론자들도 결국에는 그 상황을 직면한 후에 이겨낼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인드를 주문한다. 끝없이 자의적인 우울 속으로 빠져 들어가려는 우울모습애호가는 동기부여전문가들이 주문하는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우울모습애호가를 좋아하고 행복을 바라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우울모습애호가가 자기가 만들어 놓은 우울의 우물 안으로 계속 뛰어내리려고 시도하는 모습은 좋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로, 이건 첫 번째 이야기의 연장이면서 지금 쓰고 있는 전체 이야기의 축약이기도 한데, 우울모습애호가는 실제로 우울증을 겪게 될 가능성이 많다. 우울모습애호가는 자신의 의식 아래에서 지속적으로 우울하려고 노력하거나, 본인의 감정이 우울하려고 노력하는 건 아니더라도 계속 부정적인 말과 행동을 하려고 한다. 좀 더 자세한 우울모습애호가의 행동강령을 알고 싶다면 침착맨의 ‘이카리 신지처럼 행동하는 법’ 영상을 참고하자. 사람의 몸은 순응을 잘하기 때문에 이렇게 지속적으로 우울한 생각을 하거나 부정적인 행동, 말을 한다면 실제로 우울해지고, 이 우울감은 만성적으로 지속될 수 있다. 독서모습애호가가 만성독서가로 변신하는 것보다 우울모습애호가가 만성우울증으로 변신하는 건 더 안 좋은 변신일 수 있다. 우울모습애호가는 쉽게 우울증에 걸리고, 자기 자신을 질병에 취약한 상태로 두는 우울모습애호가의 모습은 좋지 않게 보인다.
세 번째로, 우울모습애호가 옆에 있는 건 불쾌한 일이다. 우울모습애호가는 그 정의에 따라 우울증 환자의 행동양식을 따라 하려고 한다. 여기서 ‘우울증 환자’는 우울모습애호가와 구분되는 별도의 인간 그룹이라고 생각하자. 다시 거칠게 말해서 우울모습애호가는 우울증 환자의 롤플레잉을 하게 된다. 이 롤플레잉은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에도 지속되거나, 더 강화된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모습을 좋아한다는 것은 ‘남에게 보이는 모습’을 좋아하는 걸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우울증 환자 롤플레잉을 해야 하는데, 하는 법은 ‘나 자신의 우울을 다루는 것도 벅차고 남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해서 노력할 여력이 없기에 남에게 상처 주는 행동하기’,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제대로 관리할 수 없기 때문에 지나치게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며 관계에 임하기’,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해 과도하게 폭력적으로 행동하기’, ‘실제로는 우울하지만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는 척하기(첫 번째 척하기가 들키지 않으면 롤플레잉의 의미가 적어진다, 두 번째 척하기가 들키면 민망할 수 있다)’ 등이 있을 것 같다. 우울증 환자는 위와 같은 행동을 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가능성도 있지만, 우울모습애호가는 위와 같은 행동을 좀 더 드러내놓고 할 유인이 있다. 내가 나열한 행동강령을 읽으면서 느꼈겠지만 위와 같은 사람을 대하는 건 피곤하고 불쾌한 일이다.
위의 세 가지 이유로 우울모습애호가는 다른 애호가들보다 좀 더 지탄받는데, 요약하면 지도 안 좋고 남도 안 좋기 때문이다. 계속 우울모습애호가의 특징을 이야기하면서 잠깐 착각했을 수도 있겠지만, 사람들이 우울모습애호가이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모습애호가라면 전반적으로 싫어한다. 독서모습애호가도 위에서는 좋은 점만 이야기했지만, 그건 그나마 좋은 점을 찾은 것이고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독서모습애호가도 싫어한다. 독서모습애호가가 실제로 독서는 하지 않으면서 독서가의 긍정적인 이미지(지적이거나 차분한 이미지 등)만을 취하려고 하는 걸 비웃기도 하고, 독서모습애호가가 그 위선을 앞세워 다른 사람들에게 뽐내는 꼴을 보고 싶어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