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한 요즘

침대에 붙들린 채로

by 영아


침대에 누워있다. 침대와 눕는다는 동사는 왠지 휴식을 취하는 형태로 보이기가 쉽다. 침대에 눕는다. 눕는다고 해서 맘이 편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놓여 있었다는 표현은 어떨까. 침대에 붙들려 있다. 침대에 붙잡혀있다는 말이 더 맞을까? 침대와 자신이 접착제로 붙은 듯 등을 떼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웃기라고 하는 말이면 좋겠지만, 실제로 못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요즘따라 더 많아지고 있다. 그건 쉬는 거 아니야?라는 질문에 전혀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그럼 뭐냐는 질문에는 나도 모르겠다는 횡설수설을 하는 사람이 있다. 말마디를 떠들어 댈수록 곁에 있는 사람들을 더욱 답답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 있다.


죽는 날을 기다리며 사형선고받은 사람처럼 쓰러져 있다. 이 모습이 왜인지 우울증 걸리기 딱 좋은 사람의 모습이다. 어쩌면, 그럴지 이미 우울에게 집어삼킨 것일 지도 모르겠다. 우울하다는 감정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감각해진 사람. 웃고 우는 것조차 못하는 사람.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사람. 밥을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어려운 사람. 이런 사람이 되어보지 못한 사람 중에는 우울증을 쉽게 말하는 인간이 있다. 이를테면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눈을 더 크게 떠보라는 말, 배가 고프다는 사람에게는 배가 고프지 않다고 생각해 보라는 말. 결국 생각이란 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이상한 주문을 맹신하며 폐를 끼치는 사람이 있다. 바깥으로 나가서 조금이라도 걸어야 한다. 아니면, 여행이라도 다녀오라고 명령한다. 명령이 아니라 할지라도, 상황이 되지 않는 데도 불구하고 조언하는 모든 말들은 당사자에게 명령으로 들릴 뿐이다. 아님, 재촉이거나. 명령조는 어깨를 움츠러들게 만들고 걷기를 멈추게 만든다. 그 기본적인 것도 하지 못해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들이 한심하다는 말도 오고 간다. 타자의 아픔을 공감하는 건 오만하고 어리석은 행동이다. 우린 그 누구도 남의 아픔을 함부로 재단하거나 판단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남의 아픔을 쉽게 판단하는 인간, 무척 오만하고 바보 같은 인간이 있다. 얼마나 바보 같은지 한 사례를 들어보려 한다.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이 피를 철철 흘리며 응급실에 왔다. 진단을 기다리고 있던 옆 환자가 그 사람의 피를 본인의 몸에 묻히며 ‘별로 안 아픈데?’ 하는 것이다. 찢어지고 벌어진 상처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흘리는 피만 보고서 판단하는 것이다. 얼마나 바보 같은가? 그 상처를 끌고 와 자신의 마음속에 굳이 밀어 놓고 아픔을 비교한다. 이기적이고 비열하게까지 보인다. 그렇게까지 힘들어할 건 아니지 않냐며, 이게 뭐가 그렇게 힘드냐며, 이제는 다시 일어서야 될 때라며. 사람마다 때라는 건 다르게 존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는 시간을 운운하며 재촉한다. 살아보라고, 일어서라고, 걸어보라고. 바보 같은 인간임이 틀림없다. 정이 없는 사람임이 틀림없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속담처럼, 모르는 사람일수록 입이 가볍다.


다시 돌아와, 침대에 붙들려 있는 사람이 되어본다. 천장만 온종일 보고 있으면 조금씩 날 향해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든다. 더 가까이 계속해서 조금씩 내려앉는다. 이대로 죽어버려도 좋을 것 같은 날이 온다. 죽어야만 할 것 같은 날.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없어진 날. 무책임하고 바보 같은 자기 자신이 한심스러운 날. 마음으로는 이런 자신이 미치도록 괴로운데, 정작 침대 밖을 나갈 기력조차 없는 날. 이불을 끌어당기고 잠 속으로 빠져든다. 이렇게 잠만 자고 싶은 날이기에. 잠만 자다가 죽고 싶어지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이 온다. 앞은 까마득하고 미래는 보이지 않는 그런 날이 오고야 말았다. 사람들의 조언이 더해질수록 잠수는 깊어져 가고 호흡은 가빠져간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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