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 문득

잠에서 깨어나다

by 영아


누워있는 건 게으른 것. 잠을 많이 자는 것 또한 게으른 것. 해가 떠있는 데도 불구하고 잠을 자는 건 더더욱 게으른 것. 게으른 것들 천지인 게으른 인간이 잠에서 깬다는 건 어떠한 의미일까.


눈을 뜬다. 매일 감으려 애써보지만, 다시 떠지는 눈을 증오하다가도 그 틈으로 내리쬐는 빛에 정신이 번쩍 든다. 번쩍이는 빛으로 인해 초점을 되찾는다. 낮이구나.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시간이 맞다고들 한다. 오래전부터 박살 나버린 나의 생활 패턴이 평생토록 빗겨가진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과 동시에 불쾌감이 울컥한다. 뭔데 참견이지. 분노가 치민다.


너무 밝은 거 아닌가. 어둡게 해 둔 집 안으로 햇살이 밀려든다. 구석에 박아두고 애써 모른 척했던 쓰레기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어질러진 방바닥, 쌓여간 세탁물, 들러붙은 음식물들. 어쩐지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한 번에 보이며 풍기는 냄새에 짓눌린 것만 같다. 그 냄새를 휘감고 밖으로 나가기 싫어 더욱 숨는다. 어쩌다 이런 꼴이 되었을까. 자조 섞인 말을 혼자 읊조리며 눈을 감는다.


그러나 내리 꽂힌 햇살이 잠을 내쫓은 지 오래이다. 누워만 있으려니 답답해졌다. 두 다리를 꺼내 천천히 일어나 본다. 왜인지 오늘은 그러고 싶다.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무언가가 발에 걸린다.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정리해두지 않은 비닐봉지들. 간신히 외출하고 나서 미뤄두었던 세탁물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간신히 일어나 씻은 후 몸을 닦은 수건들.


아, 이것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치워야 하나. 망설이던 끝에 떠다니는 봉지들을 먼저 줍는다. 분명 입주할 때까지만 해도 말끔했던 집이 어쩌다 이렇게 무너지게 되었나. 그런 생각을 하며 허리를 숙인다. 하나를 줍고, 또 다른 하나를 주워 한 봉지에 한 가득 담아본다.


그러고는 흩어져있던 옷들을 전부 모아 세탁기에 넣는다. 바닥을 치우고 나니 이번엔 싱크대가 눈에 보인다. 쌓인 설거지거리를 보며 히말라야 산을 등산하기 전 프로 등산인들처럼 괜히 심호흡해본다. 여름휴가에 바다도 사람으로 이렇게 붐비지는 않을 것 같다.

고무장갑을 끼고 물을 튼다. 자그마한 압력에도 달그락 소리를 내며 엉켜있던 그릇들이 무너진다. 굳어있던 기름들이 뜨거운 물에 녹아 씻기는 걸 보며 왠지 모를 개운함을 함께 느낀다. 설거지를 마친 후, 고무장갑에 묻은 물기를 탈탈 털어 널어놓는다.


둘러본 집. 치워도 아직은 더러운 우리 집. 어쩌다 이렇게 더러워졌을까. 그러다, 괜스레 미안해진다. 어쩌다 이렇게 무너졌나. 속상한 마음을 끌어안고 욕실로 들어간다. 언제 씻었는지도 모를 머리가 설거지할 때부터 걸리적거렸다. 욕실 바닥은 너무나 말라있다. 욕실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는 증거가 머리부터 발 끝까지 느껴진다.

손을 뻗어 물을 튼다. 차가운 물이 쏟아진다. 얼음장 같은 물에 놀라 한 걸음 뒤로 빠진다. 그러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물이 아래로 떨어진다.

앞으로 다가간다. 그 물 안에서 운다. 머리를 대기도 전에 그렇게 운다. 거품을 따라 거대했던 꿈을 물로 한 번 헹궈내고, 여전히 미끄러운 패배감을 물로 다시 씻어낸다. 욕실 거울은 수증기로 인해 뿌옇다. 그 거울 위로 손가락을 대어 하트를 그린다.

걸어 잠근 샤워호수에서는 아직 나올 것이 남았다는 듯 자그마한 물들이 떨어진다. 다시 또 오라고, 금방 또 오라고. 우리 곧 보자고. 이렇게 씻겨 주겠다며 뚝뚝 인사한다.


사람은 갑자기 바뀌지 않는다. 서서히 바뀐다. 그리고 서서히 무너진다. 솟구쳤던 실패와 좌절이 솟구친 행복으로 곧바로 변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솟구치던 것들이, 들끓던 것들이 잠잠해지고 나면 다른 곳에서 행복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두 시간 동안 물아래에서 눈물을 흘리던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스스로가 놀라워서 울다, 불쌍해서 울다, 무너진 내가 괜스레 미워서 운다.

이 몸을 뜨거운 물이 아닌 내 눈물이 씻어주는 것만 같아 더 운다. 왜 우는 걸까. 누구에게 미안해서인가. 어떤 게 힘들어서인가. 어디에 가고파서인가. 그것도 아니면 손 놓기엔 내가 아직 나를 너무 사랑해서인가.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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