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딸은 벨기에에 처음 올 때 21개월이었다. 벨기에는 만 3세부터 유치원을 다닐 수 있는데
이때부터가 공교육이 가능한 시점이다. 국제학교 같은 사교육 시스템에선 2년 6개월부터 받아주기도 한다.
그래서 유치원 전에는 어린이집에 보내야 한다. 어린이집은 보육비용이 꽤 들어서 한 달에 200유로 가까이
냈던 것 같다. 대신 식사를 주고(샌드위치나 가벼운 죽 종류이긴 하다) 6시까지도 봐주니까 비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이는 말이 좀 빠른 편이어서 21개월 때도 단어 정도는 말하기도 했었는데,
와서 두 달 정도 정착하고 어린이집을 가니 갑자기 선생님이 네덜란드어를 했을 거다.
딱한 일이긴 했지만, 이 나이는 언어로 소통보다는 동작과 표정, 몸으로 소통하는 시기라 언어에 대한 걱정은 안 했던 것 같다.
그 사이 말이 늘어, 2돌 지나고 몇 달이 지나자 문장으로 제대로 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한국인 가정이고 집에서 쓰는 한국말이 이미 모국어로 자리가 확실히 자리 잡힌 건 알 수 있었다. 우리 엄마랑 내가 하는 대화의 어휘들과 표현방식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걸 보면서 말이다.
만 3세까지는 어떤 언어가 입력되어도 머릿속에 동시에 쌓인다던데(언어학자들 내지 유아교육 전문으로 하는 분들의 유튜브를 공부하며 들은 얘기다), 과연 딸내미의 머릿속에 그렇게 쌓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만 3세에서 3개월 모자라던 작년 8월 말, 드디어 불어 공립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나도 불어 초급을 배우고 있는 형편에 과연 잘해나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요즘 시대엔 구글렌즈가 있고, 구글번역이 있다.
더 다행인 건, 1학년 담임과 보조선생님이 영어를 꽤 잘했다. 불어권 사람들은 은근 영어가 그리 능숙하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이것도 개인차라... 그리고 젊을수록 영어를 더 잘한다.
이때부터 몇 달은, 집에서 불어를 전혀 하지 않아서 과연 애가 불어를 들은 것이 얼마나 정착이 되고 있는지, 아니 그거보다 수업을 따라가긴 하는지 선생님이 하는 말을 알아듣고 뭔가 불편한 건 없는지 같은 것들이 궁금했다.
학기말 경에 개인당 10분씩 아이의 성향과 지내는 모습에 대해 상담하는 시간이 주어진다(1학년 스테파니 담담 임선생님은 상담이 영어로 가능한 수준이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우리 아이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대로의 성향을 선생님이 말해줘서 그건 그런가 보다 했지만,
언어에 대한 부분은 꽤 궁금했었는데, 선생님 얘기에 따르면 선생님이 하는 불어를 다 알아듣고, 짧은 단어나 문장을 불어로 표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웬일인지 불어로 20까지는 셀 수 있는데 이건 로컬 아이들도 다 그런 건 아니라며 신기하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아이가 집에서 불어를 전혀 쓰지 않더라도 아이의 불어는 늘어가고 있고 적어도 못 알아들어 힘든 부분은 별로 없다는 얘기. 표현도 더 많이 하면 좋겠지만 인풋이 아직 그렇게 많이 된 건 아니니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지 않을까 했다.
이 사이에 무슨 실험정신이 발동했는지 영어 학원도 일주일에 한 번 보내기로 했다.
사실은 영어도 어릴 때 노출을 좀 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좀 있기도 했고, 머리 안에 언어의 구획이 짜진다는
유튜브 선배들의 말에 좀 기댄 것도 있다. 일주일 한번 1시간이 뭐 그리 대단한 인풋은 아니어도, 1-2년 계속하면 당연히 안 하는 거보단 나을 거란 생각도 있었고.
의외로, 학원이라서인지 별도앱도 운영하고 거기에 오디오 클립도 올려줘서, 아이가 어떤 노래를 듣고 어떤 스토리를 듣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만 3세 반에서는 문장을 가르치지 않고 단어만 가르치고, 만 4세가 되면 문장이 들어간 스토리를 들려준다고 했다.
그래도 영어가 불어보단 여기저기서 더 많이 보이고 들려서인지, 아이는 곧잘 문장도 얘기하고, 내용도 틀리고 단어도 막 지어낸 게 틀림없는, 악센트만 영어인 말들을 곧잘 하고 있다. 영어의 방은, 구획은 지어져 있는데 콘텐츠가 좀 부족한 게 틀림없다.
주 5회, 6시간씩 노출되는 불어, 주 1회 1시간씩 노출 플러스 집에서 트는 각종 이야기와 엄마영어, 영상에서 노출되는 영어, 그리고 모국어인 한국어.
4돌이 다되어가는 지금 현재, 한국어는 마치 어른이 말하는 양, 문장의 패턴을 그대로 가져와 자못 제대로 된 문장으로 술술 얘기하는 수준이다. 역시 모국어가 맞았던 거다.
영어는, 아직도 악센트만 흉내 낸 이상한 문장들을 주로 얘기하지만, 그래도 한 번씩 뜬금없는 완성형 문장을 내뱉거나, 어디서 들은 문장을 "저건 한국말로 이런이런 뜻이야"라고 설명도 해줘서, 도대체 어떻게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 건지 정확히는 알 길이 없다.
불어는, 배워온 불어 노래를 저녁 먹다 갑자기 소파 앞에 서서 동작까지 함께 공연을 하는 중이다. 의미를 정확히 안다기보다 유아 때의 통째 암기력으로 그냥 외운 노래를 부르는 거라고 봐야 할 것 같다. 혼자서 불어로 말도 주절주절 가끔 한다. 물론 엄마의 실력으론 다 알아들을 수 없지만,
유치원 1학년이던 작년과는 확연히 달라진 fluent 한 구사력이 느껴진다.
언젠가 다 커서도, 불어를 꽤 할 수 있으면 이 아이에게 자산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여전히 있고,
한편으론 영어를 고급으로 구사하는 것도 상당한 투자와 시간이 들어가는 건데 3개 언어를? 과연,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