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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세 Oct 13. 2023

지나간 기억과 다가올 기억

리사 제노바 '기억의 뇌과학(Remember)'

동네 뒷산 등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남편과 나는 입에서만 맴도는 그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해 내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 왜 MBC 앵커였다가 JTBC 사장도 하고, 성이 시옷으로 시작하지 않나? 둘의 머리를 맞대보았지만 떠오를 듯 말 듯 집에 도착할 때까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정도 포기하고 샤워하러 들어간 욕실에서 맞아! 손석희!! 어둠 속에서 백열전구가 켜지듯 번쩍하면서 이름이 떠오른 것이다. 그 이름을 소리치면서 내가 기억해 낸 것이라고 의기양양했던 적이 있다. 50을 왔다 갔다 하는 남편과 나에게 이런 종류의 일들이 잦아지고 있다.


이처럼 기억이 혀끝에서 맴도는 것을 설단현상(Tip of Tongue)이라고 한다. 단어, 특히 사람 이름, 도시 이름, 영화 제목 같은 것은 고유명사에서 흔하게 나타나는데, 당장 눈앞에 보이지는 않지만 뇌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신경과학자 리사 제노바(Lisa Genova)가 쓴 '기억의 뇌과학(Remember)'에서 모든 단어는 연관된 신경세포들이 활성화되어 연결되었을 때 불러올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연관된 신경세포들은 단어가 어떤 모양인지, 그 단어가 무슨 뜻인지, 어떤 감각, 감정, 경험과 연관되어 있는지, 또 단어를 발음했을 때 어떤 소리가 나는지 등을 저장하는 세포들로 단어를 떠올릴 때 필요하다고 한다.


설단현상의 빈도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증가한다고 한다. 뇌의 처리 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이기도 하고, 젊었을 때에 비해 설단현상을 필요 이상으로 심각하게 느끼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설단현상은 기억을 불러오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오류로, 알츠하이머병의 초기 증상이 아니니 설단현상에 겁을 먹지 말라고 이 책의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 이유로 베이커/베이커의 역설(Baker/Baker Paradox)을 설명하는데, 누군가 나와 친구에게 같은 남자의 얼굴 사진을 보여주며 나에게는 그의 직업이 베이커(제빵사)라는 정보를, 친구에게는 그의 이름이 베이커라는 정보를 알려준다. 며칠 후에 같은 사진을 보여주며 기억나는 것을 말해보라고 하면 내 친구가 그의 이름인 베이커를 떠올릴 가능성보다 내가 제빵사라는 직업을 떠올릴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제빵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연관된 신경세포가 많아 활성화 경로가 다양하게 열려있는 반면에 사람 이름으로서의 베이커는 추상적인 개념으로 특별한 경험이 없다면 신경회로가 더 뻗어나갈 여지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기억인출 과정은 구글 검색과 유사해서 사람 이름 보다 직업으로서의 베이커를 찾아본 이력이 많을 것이고, 이렇게 검색 이력이 많을수록 그것에 관한 신경 구조가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어 기억을 더 쉽고, 빠르게 떠올릴 수 있다고 한다.


기억의 종류 또한 다양해서 기억이 생성되고 저장되는 과정과 방식에 따라 작업기억, 근육기억, 의미기억, 섬광기억 등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미래 기억이라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기억은 과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을 미리 정해두고 잊지 않는 것이다. 평소 기억의 대상을 과거로만 한정해 왔던 나에게 기억의 범위를 미래로 확대할 수 있다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주었다. 하지만 어떤 기억이건 생성되려면 반드시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는 것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일반적인 건망증(내 차를 세워둔 곳을 기억 못 하는 것)과 알츠하이머병으로 인한 기억 손실(내가 차를 소유하고 있다는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차이가 있는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애초에 기억이 만들어지지 않은 건망증과 달리 알츠하이머병 환자들은 한 시간 전에 점심으로 무엇을 먹었는지(심지어 점심을 먹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알츠하이머병 초기에는 새로운 기억이 생성되는 것을 방해하는 정도로 시작되지만, 결국에는 이미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기억도 비극적인 방식으로 망가뜨린다. 알츠하이머병 환자는 하루에 수십 번씩 설단현상을 경험하며 첫 글자가 떠올라 나머지 기억을 이끌어내 주는 일 같은 것도 없다. 대개 고유명사가 잘 떠오르지 않는 일반적인 설단현상과 달리, 고유명사건 보통명사건 차이가 없다고 한다.




2020년 우리나라 65세 이상 고령인구 10명 중 1명은 치매를 앓고 있으며, 이에 따른 관리 비용은 19조 원에 가까운 것으로 조사되었다. 치매 유형별로는 알츠하이머 치매가 75% 이상으로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한다. 65세 이상 고령인구에서 차지하는 치매 환자의 비율은 2020년 10.3%에서 2050년 15.9%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보건복지부, 대한민국 치매 현황 2021). 더군다나 기대수명 연장과 출생률 감소 등의 영향으로  65세 이상 고령인구는 2020년 15.7%에서 2050년에는 40%를 넘어설 전망(통계청, 장례인구추계 2021)이라고 하니 우리 사회가 감당해야 할 치매에 대한 부담은 시간이 지날수록 어깨를 더 짓누를 것이 확실하다.


치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알츠하이머병의 원인에 대해서 많은 과학자들은 베타 아밀로이드(amyloid beta)라는 단백질이 뇌 속 신경세포에 찌꺼기를 형성하면서 시작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주 초기 단계의 환자에게는 자각 증상이 없지만 아밀로이드 찌꺼기가 15년에서 20년에 걸쳐 쌓여가다가 어느 날 한계에 도달하면 신경에 염증이 생기고 세포가 죽으면서 기억이 비정상적으로 소실된다. 만약 이런 알츠하이머병의 발생 가능성을 미리 예측할 수 있다면 비극적인 기억의 훼손을 방지하거나 적어도 늦출 수 있지 않을까?


이와 관련하여 "노년에 발생할 수도 있는 치매를 사전에 예측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장기간 추적 연구를 진행한 연구팀이 있다. 미국 국립노화연구소(National Institute on Aging) 연구팀은 10,000명이 넘는 참가자를 대상으로 30년 동안 혈액 검사를 하였고, 혈액 내 단백체(몸 전체에 있는 단백질의 총집합)를 분석하였다. 그 결과, 45∼60세 사이의 참가자들에게서 노년의 치매 발병 가능성과 높은 상관관계를 보이는 32개의 단백질을 발견하였다(Science Translational Medicine, Proteomics analysis of plasma from middle-aged adults identifies protein markers of dementia risk in later life, 2023.7.19)


일부 단백질은 뇌에서 역할을 하지만 대부분은 단백질 항상성, 면역체계와 연관되어 뇌가 아닌 다른 부위에서 역할을 하는 단백질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단백질의 합성과 분해는 그 균형이 잘 맞아야 우리 몸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데 이를 단백질 항상성이라고 말하며, 단백질 항상성이 망가지게 되면 각종 암이나, 면역질환, 신경질환 등의 원인이 된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단백질 항상성은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뇌에서 발견되는 아밀로이드 단백질 찌꺼기의 생성을 막는 데에 중요하다고 한다. 또 과거에 면역질환을 앓은 사람들이 알츠하이머병에 더 취약하다는 사실이 다른 연구에서 규명되기도 하였다.


이번 연구에서 발견한 32개의 단백질은 노년의 치매 발병 가능성을 사전에 예측하는 데에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이들 단백질이 치매 발병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만약 이러한 단백질들이 치매 환자별로 어떤 변화를 나타내는지와 같은 추가적인 연구를 하게 된다면 보다 개인화된 치료의 바이오마커(지표)로서 사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치매를 좀 더 빨리 알아챌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이번에는 이미 발병한 치매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그동안 치매를 효과적으로 치료하는 약이 없었다. 2003년 이후 20년 가까이 새로운 치료제가 나오지 못하다가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치매의 주요 원인 질환인 알츠하이머병에 대해 단순히 증상 완화가 아닌 질병의 진행을 억제하는 치료제가 등장하고 있다. 2021년 6월 아두카누맙(aducanumab)이 긴 침묵을 깨운 이후, 2023년 1월 레케네맙(lecanemab)이 미국 FDA의 신속 승인을 받았으며, 임상 3상 결과가 공개된 도나네맙(donanemab)도 조만간 시장에 출시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들 치료제는 모두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뇌에 있는 신경세포 손상 단백질인 아밀로이드를 표적화하는 항체치료제이다. 도나네맙의 경우, 알츠하이머병 초기 단계에 복용을 시작한 사람들 중 47%가 1년 후 질병 진행이 없었던 반면에, 위약을 복용한 사람들은 29%에 머무는 것으로 관찰되었다(JAMA, Donanemab in Early Symptomatic Alzheimer Disease, The TRAILBLAZER- ALZ 2 Randomized Clinical Trial, 2023.7.17.) 극적인 치료 효과를 기대하기에는 아직 이르나, 병의 진행을 손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에 비하면 한 걸음 나아간 진전이라 할 수 있다.


70세 정상인의 뇌(왼쪽)와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70세 환자의 뇌(오른쪽) 사진 비교

출처 : Nature, ‘Transmissible’ Alzheimer’s theory gains traction, 2018.12.




디지털카메라가 필수 가전제품이던 시절이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만한 디지털카메라로 아이의 사진과 동영상을 많이도 찍어댔다. 백일 즈음 아기가 응아 한다고 힘주는 표정이 어찌나 신기하고 귀여운지 그 순간을 촬영했던 기억이 난다. 또 큰 아주버님 가족을 기다리던 서대전역 대기실에서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기가 넘어질 듯하면서도 어찌나 뽈뽈 걸어 다니던지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남편의 모습이 함께 담긴 동영상도 기억에 깊게 남아 있다. 


시간이 흘러 아이가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돼 가면서 카메라는 핸드폰 기능으로 충분해졌지만, 사진이나 특히 동영상은 찍을 일이 거의 없어졌다. 그나마 얼마 전 등산하고 내려오는 길에 만났던 다람쥐(밤을 입에 문), 아기 고양이(놀아달라고 다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가 동영상의 주인공이었다. 평범한 일상이 아니었던 아기 때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지금은 카메라를 들이대기에는 그저 밋밋하고 멋쩍은 것 같다.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인가 카메라에 자신의 모습이 담기는 것을 피하기 시작했는데, 이것도 또 다른 이유일 수 있다.


한편에서는 그런 것 같다. 내가 성장했던 그 시기, 통과해 왔던 그 시간을 되돌아보면 부모님이 슈퍼 히어로가 아니라는 것, 내가 참 보잘것없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 이후 한참 동안 기억하고, 기억되는 것 자체를 별 의미 없다고 생각했고 어쩌면 불편해했던 것 같다. 여기에서 기억이란 시험, 연구, 업무와 관련된 기술적인 기억(암기)이 아닌 내가 살아온 또 살아갈 인생에 대한 추상적인 기억으로 한정하고 싶다. 또 그런 점도 있는 것 같다. 어리고 종속적이던 시절의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 힘들었던 기억조차 좋은 추억이 된다고 흔히들 말하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왔지만 꼭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암울했던 기억으로 생채기 난 신경세포는 뇌 속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조그만 단서나 연상만으로도 움찔하며 그때의 아픔이, 불쾌함이, 원망이 되살아난다.


아마 힘들고 불행했던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잊고 싶은 나쁜 기억은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자신에 대한 것과 그때 그들은 왜 그랬을까 하는 타인에 대한 것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것이든 타인에 대한 것이든 해결방법은 동일한 것 같다. 좋지 않은 기억이 발생했던 그때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분리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암울했던 기억의 원인과 이유를 찾아 뇌 속 신경세포를 하나하나 뒤지고 있는 과거의 내 손을 잡고, 편하게 쉴 수 있는 아늑한 곳으로 이끄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모든 기억에 대해 수고와 경의를 표하고 것이다.


한동안 기억을 의미 없다고 생각했지만 보잘것없는 나도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고,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구나 라는 존재 가치를 느끼게 된 순간부터 기억을 강하게 끌어당기게 된 것 같다. 이제 성인을 코 앞에 둔 내 아이는 기억하고 싶어 할까?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가족에 의한 1차원적인 사랑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와는 다른 아픈 기억이 있을 수 있고 그래서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이것 하나만 생각해주었으면 한다. 다가올 기억은 스스로 만들어간다는 점을 말이다. 물론 엄마, 아빠는 행복한 미래 기억의 세트 메뉴로 항상 곁에 있을 것이지만 좋은 친구, 동료들을 만나고 서로 노력하면서 반짝반짝 존재 가치를 다듬어 가기를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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