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야 강변살자 2화

느린걸음, 그 안에 피어난 사랑

by 송필경

나는 언제나, 걸음이 느렸다.
내 유년의 첫 기록은 느린 걸음이다. 내게는 잊힌 채 전해지는 이야기. 한 박자 늦은 발걸음은 심지어 한 살 어린 동생보다도 더뎠다 했다. 기억 너머 아련히 남아 있는 그 목소리, 아마도 누군가의 염려였을 것이다. “왜 이리 천천히 걷니, 우리 아들아.” 그 말 끝에 스친 한숨과 미소까지, 나는 이야기로 배웠다.


울퉁불퉁한 자갈과 시멘트가 뒤섞인 골목.
수없이 작고 연약한 발이 그곳에서 비틀거렸을 테다. 넘어질 때마다 흙먼지를 뒤집어썼을 어린 나를 끌어안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일으켜 세워준 따스한 온기가 있었다고 나는 들었다. 그 품은 늘 같은 속도로 나를 감쌌고, 나는 그 온기에 막연히 안도했을 뿐이다. 세상이 설령 나를 기다리지 않는다 해도, 바로 그 곁에 숨 쉬는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 어린 나는 알지 못했다.


내 걸음은 그저 느린 속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밤이면, 전해 들은 이야기 속에서 작은 손과 발을 하나하나 어루만지며 잠 못 이루던 온기가 기억 저편에서

아른거린다. “혹시 다치진 않을까, 혹시 뒤처지진 않을까.” 그 염려의 깊이와 속절없는 마음을 어린 나는

단 한 뼘도 헤아릴 수 없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방 안, 조용히 이어지던 숨결과 기다림의 시간만이, 훗날 내게 마음의 형태를 가르쳤다.

전해 들은 이야기 속, 어린 나는 세상과 언제나 일정 거리를 두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 더딘 발걸음조차 사랑은 결코 놓지 않았다. 매일 아침, 묵묵히 나를 일으켜 세우고 손을 잡은 채

다시 걸음을 이어나갔다. 작은 신발끈을 고쳐 매고, 자갈을 털어내고, “다시 한 번.” 그 모든 손길이 훗날

내 삶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지, 그때의 나는 예측할 수 없었다. 다만 손의 온기가 길의 방향이 되어주었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 나를 자라게 했다.
느림은 내 몸의 속도였고, 기다림은 곁의 사람들의 일상이었다. 느림과 기다림이 포개어진 채 우리는 계절을 건넜다. 아직도 나는 그 계절들의 냄새를, 이야기를 통해서지만 분명히 기억한다.


네 살, 혹은 다섯 살 무렵.
나는 갑작스러운 열에 위태롭게 몸을 맡겼다고 전해진다.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라 움직일 수조차 없었고,

숨마저 가빴다고 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어린 나는 과연 무엇을 알았을까. 오직 나를 지켜야 한다는

두 사람의 절박한 마음이 세상을 집어삼켰을 뿐이라는 것, 그 무게가 삶에 어떤 파동을 일으키는지 어린

나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아주 오래된 듯 희미하지만 선명한 그날의 기억.
어디선가 들었던 그 이야기 속에서, 두 사람은 다급히 나를 두 팔로 감싸 안고 맨발로 골목을 달렸다.

그곳은 늘 내가 느린 걸음으로 익숙하게 밟았던 그 골목이었다. 발바닥에 생생히 전해지는 자갈의 거친 감촉,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긴장된 뉴스, 멀리서 스치는 발소리와 먼지 섞인 공기—차갑고 불안한 기운이 숨 쉬듯 밀려왔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내 작은 생명을 위한 사투였다는 걸, 나는 그때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린 내가 품에 안겨 느낀 손은 땀으로 미끄러웠고,
맨발에는 작은 상처가 났지만 그조차 몰랐다고 했다. 두려움에 파르르 떨리던 눈빛, 어린 내 체온을 살피며

끊임없이 나를 감싸던 손길. 골목 끝을 돌아설 때마다, 숨이 가빠질 때마다,

그 손은 더 세게 나를 끌어안았다고 한다. 그 품의 무게가 곧 기도의 무게였다는 것을 나는 훗날에서야 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희고 차가운 벽과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
삐걱이는 문소리와 바쁜 발걸음들 속에서 나를 감싸던 지독한 긴장감이 하나의 풍경처럼 전해진다. 열로 몸이 달아오른 나는 아직 작았다. 그 순간의 의미를, 어린 나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내가 바로 세상 모든 사랑의 중심임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는 건, 오직 지금의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 비로소 새기는 감각이다.


뜨거운 열과 떨림이 지나간 그 자리에는,
두 팔과 맨발 자국, 그리고 끝없는 걱정과 사랑만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병원에서 나오는 길, 자갈 위에 찍힌 작은 붉은 점과, 한동안 말을 잃은 채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는 이야기까지—그날의 모든 흔적이 오늘의

나에게로 이어져 있다. 그 흔적들이 내 안에서 길이 되고, 그 길을 나는 천천히라도 걷는다.


이 모든 이야기를 통해, 이제야 나는 이해한다.
빠르게 걷지 않아도, 남들보다 늦게 달려도 세상이 나를 기다려주지 않을지언정, 사랑은 나를 끊임없이 따라오며 내 걸음을 지켜주고 있다는 것을. 절박한 순간마다, 맨발로라도 달려 나를 안아 올리던 그 사랑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느림은 결함이 아니라, 함께 걷는 사람들의 호흡으로 완성되는 속도라는 것을.

나는 이제 걸음을 늦게 걷는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느린 발걸음 속에서,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순간마다 느껴지는 그 사랑의 숨결이

더욱 선명히 빛나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포개어진 이 걸음이, 내 삶의 가장 아름다운 속도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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