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사람

by 송필경

전화는 새벽에 왔다.

낯선 번호였다.

“보호자 되시죠?”

짧은 설명이 이어졌다.
호흡 곤란. 응급실 이송. 의식 저하.

K는 질문하지 않았다.
주소만 듣고 전화를 끊었다.

병원 복도는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하얀 불빛 아래 할머니는 작게 누워 있었다.

산소 마스크가 얼굴을 가렸고, 손등에는 얇은 관이 꽂혀 있었다.

기계음이 규칙적으로 울렸다.

정해진 간격.
정해진 리듬.

할머니가 평생 지키려 했던 것과 닮아 있었다.


K는 침대 옆에 앉았다.

“왔나.”

할머니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K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바쁘다더라.”

누군가에게 들은 모양이었다.

K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명해도
남지 않을 것 같았다.

한참 후, 할머니가 말했다.

“튀지 마라.”

짧은 문장.

늘 하던 말이었다.

어릴 적,
학교에서 다툼이 있었을 때도,
시험을 포기하고 싶다 했을 때도.

“튀면 다친다.”

그 말은 경고이면서 기도였다.

K는 처음으로 그 문장을 다르게 들었다.

튀지 않으면 지켜질 거라 믿었던 사람의 말.

조용히 살면 무사할 거라 믿었던 사람의 말.


그러나
조용히 살아도
세상은 멈추지 않았다.


기사 몇 줄에
삶이 정리되었고,
질문은 묻혔고,
기억은 사라졌다.


할머니는 그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조용히 살라고 했던 것일지도.

“준원아.”

K는 순간 고개를 들었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K가 아니라,
고준원.

“다치지만 마라.”

손이 떨리며 K의 손을 찾았다.

힘은 거의 없었다.


그 손을 잡은 채
K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켜주겠다고도,
약속하겠다고도.

그 어떤 말도
이제는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기계음이 한 번 길게 울렸다.


의료진이 들어왔고,
짧은 움직임이 있었고,
그리고 정적.


모든 것은
빠르게 끝났다.

설명은 간단했다.

고령,
기저질환,
자연 경과.

언제나 그렇듯
문장은 짧았다.


장례식은 조용했다.

조문객은 많지 않았다.

이웃 몇 명,
예전 교회 사람 둘,
동네 가게 주인.

조용히 살았던 사람의
조용한 마지막.

K는 빈소 한쪽에 앉아
영정사진을 오래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웃고 있었다.

늘 그랬듯
크게 드러나지 않는 표정.


집으로 돌아온 밤,
방 안은 비어 있었다.

식탁 위에는
약 봉지가 남아 있었고,
달력에는 병원 예약 날짜가 동그라미 쳐져 있었다.

그 날짜는 이미 지나 있었다.

K는 할머니 방을 정리하다
낡은 수첩 하나를 발견했다.

빳빳하지 않은 종이,
연필로 눌러 쓴 글씨.

생활비 내역,
메모,
병원 기록.

마지막 장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준원 시험 잘 되게 해주세요.”

기도처럼.

그 아래,
작게 덧붙여진 말.

“괜히 튀지 말고.”

K는 수첩을 덮었다.


그동안 붙들고 있던 이름이
문득 가벼워졌다.

K.

익명.
기호.
질문하는 사람.


그러나 장례식장 명부에는

다른 이름이 적혀 있었다.

고준원.

지워지지 않는 이름.

모니터를 켰다.

블로그 계정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글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검색도 되지 않았다.

K_project_public 폴더를 열었다.

자료는 그대로였다.

그러나 더 이상 이 이름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K는 알았다.

익명은 보호였지만, 동시에 한계였다.

할머니는 조용히 살라고 말했다.

그러나 조용히 사라지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커서를 옮겨
프로필 수정 창을 열었다.


이름을 지웠다.

K.

잠시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입력했다.

고준원.

엔터를 누르기 전,
창밖을 바라보았다.

밤은 깊었고, 도시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름은 바뀌고 있었다.

엔터를 눌렀다.


다음 화 예고

11부|이름을 가진사람

S는 누구인가?

익명은 사라지고,
책임이 남는다.

고준원과 성시현
다른 방식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설명으로는 바뀌지 않는 세계를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