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그해 겨울,우리는 뜨거웠다.

잔향

by 송필경

그해 겨울,
눈밭 위 서로의 체온을 지키주며 걸었다.


얼어붙은 숨결 사이
하얀 입김은 밤하늘 아래 오로라처럼 퍼져
한순간 세상을 비췄다.

발밑의 눈은 서걱이며 우리를 기록하고
바람은 귓가에 남았다 —
닿을 듯, 닿지 않을 듯한 약속처럼.

사랑은 언제나 몇 걸음 뒤에서 피어난다.
손끝의 서늘함은 가슴 밑바닥에서 미열로 맴돌고
그 온기는 말하지 못한 채 심장 속에서 오래

그렇게 조용히 타올랐다.

우리는 섣부른 고백 대신
눈길 닿지 않는 곳에 약속을 묻었다.


얼음장 아래 숨겨 둔 작은 심지,
잊혀질 시간을 건너 다시 숨 쉬리라 믿으며.

이제 그대의 계절은 다른 은하 아래,
나는 눈 속을 걷는다.


하나씩 쌓인 기억 위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고
발밑의 진흙은 우리의 흔적을 천천히 삼킨다.

기억은 녹은 눈물처럼 손바닥에 스며든다.
숨 막히던 온기가 핏줄 속에서 되살아나
온몸에 아린 그리움으로 번져 간다.

어스름 저녁,
그날의 잔향과 눈부신 숨결을 떠올린다.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이름을 바꾼 채
다른 시간의 빛으로 스며든다.

그 자리마다 우리는 여전히 뜨겁다 —
보이지 않는 불씨가
아직도 내 안에서 조용히 호흡한다.



겨울의 기억은 이상하게도 오래 남는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나눈 말들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식지 않는다.

그해 겨울, 우리는 눈길 위를 천천히 걸었다.
서로의 체온이 공기 속에서 하얗게 피어오르던 밤.
그때의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되는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겨울의 순간들은 아주 짧았지만
마음속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람의 기억 속에는
어떤 계절이 오래 머문다.

내게는
그해 겨울이 그렇다.

월, 수,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