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어떤 골목은 조금 늦게 끝난다

by 송필경

라일락이 진 골목을 지난다
보도블록 틈마다 눌린 보라가 남아
신발 밑창이 가볍게 붙고
발을 떼면 무언가 조금 늦게 떨어진다

몇 걸음 뒤에서

조용히 이어지는 소리

돌아보면 아무도 없는데
방금 전의 걸음이
아직 바닥에 남는다

편의점 유리문이 열렸다 닫힐 때마다
빛이 골목을 접었다가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펴 놓는다

그 사이를 지날 때마다
지나온 쪽이 조금 길어지고
아직 가지 않은 쪽이 가까워진다

손을 씻고 나왔는데도
손목 안쪽에서 냄새가 남아
방향을 먼저 바꾸고
발은 그보다 늦게 따라간다

골목 중간에

비어 있는 우산 하나

아무도 잡고 있지 않은 손잡이가
잠깐씩 방향을 바꾸는 동안
맞추려 할수록 걸음은 조금씩 어긋나고
비어 있는 간격이 조용히 늘어난다

라일락은 이미 다 졌는데
골목은 아직 다 지나가지 않아서

끝에 가까워질수록
남아 있는 쪽으로
자꾸 발이 기울고

누가 먼저 지나갔는지
아직 지나고 있는지 모르는 채

같이 걷고 있었던 것 같은 자리마다
조금씩 어긋나 있다

나는 내가 아닌 쪽에 맞춰
조금

늦게 지나간다


라일락이 질 무렵의 골목을 걸어 보면 바닥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나무 위에서는 꽃이 거의 보이지 않는데, 보도블록 사이에는 아직 보라가 남아 있다.

사람들은 그냥 지나간다.
신발 밑창에 꽃잎이 조금 붙었다 떨어져도 대부분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몇 걸음쯤 지난 뒤에야 바닥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라일락이 진 골목을 걸으면
이미 지나온 쪽을 한 번쯤 돌아보게 된다.

누가 있어서가 아니라
방금 지나온 시간이 조금 늦게 따라오는 것 같아서.

편의점 유리문이 열릴 때마다
골목이 잠깐 밝아졌다가 다시 어두워진다.
그 사이를 지나가다 보면
앞보다 뒤쪽이 조금 더 길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마 어떤 장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천천히 끝나는 모양이다.

이미 지나왔다고 생각했는데도
조금 더 남아 있는 냄새가 있고,
조금 더 이어지는 걸음이 있고,
조금 더 늦게 돌아오는 시간이 있다.

그래서 가끔은
골목 끝에 다 와서도
걸음을 조금 늦춘다.

아직 끝나지 않은 것들이
조금 더 따라올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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