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해우소

[독백] 차라리 영화였다면..

by 유랑

오늘따라 유난히 영화의 뒷 이야기가 궁금하다.


사랑을 찾아 떠나버린 '윌 헌팅'은 그녀를 만났을까?

그를 다시 보게 된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들은 얼마나 오래 함께했을까?

그 뜨겁던 마음은 평생 식지 않았을까?


'섬머'를 떠나보내고 한참을 폐인처럼 살던 '탐 핸슨'은

'어텀'을 예전처럼 진심을 다해 좋아할 수 있을까?

'탐'에게 사랑이란 여전히 운명적이고, 진중하며, 자신을 다 던질만한 감정일까?


'은수'를 그냥 지나쳐버린 '상우'는 그 후로 그녀를 다시 떠올리지 않았을까?

그에게는 '은수'를 지나치는 것이 일종의 복수였겠지만

한 번쯤, 그때 다시 시작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후회하진 않았을까?



내 영화가 끝났다.

제작기간 6개월, 연출·각본·출연 모두 내가 맡았던 영화.

등장인물은 나와 그녀, 주변 친구들.

제목은 '짝사랑'이라고 하는게 낫겠다.


주인공인 '나'는 어리숙한 남자다.

'500일의 섬머'의 주인공인 '탐'처럼 운명적인 사랑을 믿으며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없다고 믿고 있다.


고등학생 시절, '나'는 운명이라고 느껴지는 한 여자를 만났고

꽤 오랜시간, 혼자 바라만 보았다.

그리고 운명처럼 그들은 연애를 시작했으나 그들의 연애는 뜨거운 냄비처럼 금새 끝이 나버렸다.


'나'는 두 달을 굶었다. 덕분에 건강도 나빠져 하숙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 후로 '나'는 누군가를 좋아할 수 없었다.

감정을 다 쏟은 이유도 있겠으나,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 자체를 부정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세상의 시련은 혼자 다 겪은 양 사랑이란 감정을 아주 단단한 상자에 걸어 잠그고

아무도 찾지 못할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두었다.


'시간이 약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을 이해하기까지는 약 7년 정도 걸린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기까지는 거기서 3년이 지난 후였다.


그렇게 10년이 지난 어느 날. 주인공인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나'는 첫눈에 '그녀'에게 반했다.

주변 친구들에게는 이런저런 이야기로 둘러댔지만, 사실은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가 좋았다.

'그녀'의 전공, 습관, 성격. 그 모든게 마음에 들었다.

'지금까지 내가 바라던 모든걸 갖춘 사람이 있었나? 이건 정말 운명이 아닐까?'


그렇게 '나'는 혼자 사랑을 시작하게 되었다.

10년이란 시간은 과거의 교훈을 잊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나'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고,

이제는 결과가 어떻게 되든 예전처럼 좌절하고 주저앉지 않으러라 다짐했다.

구석 어딘가에 숨겨 두었던 상자를 자신의 손으로 옮겨와, 그녀가 열어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은

버스로는 4시간 반, KTX로는 2시간 50분.

그게 그 둘의 거리였다.


6개월 동안 얼굴을 본 건 고작 네번. 오로지 휴대폰으로만 소통할 수 있는 관계.

꿈 속에 사는 '나'에게는 문제가 안되지만

현실에 사는 그녀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전해지지 않을 관계.


혼자 감정을 키우던 '나'는 고백할 용기가 없어 주변에 머무르기만 하다가

결국 친구의 말을 빌려 자신의 마음을 전했고

그녀는 '나'의 마음을 불편해한다.


그런 어정쩡한 시간이 조금 흐른 뒤, '나'는 용기내어 고백하려 했으나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체념하듯,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 '나'는 그녀에게 편지를 쓴다.

'그동안 고마웠다, 미안했다, 좋아한다'

' 이젠 나도 내 감정 정리하겠다, 먼저 연락하지 않겠다...'


지키지도 못할 말을 적은 '나'는 너무 후회가 남아 쪽팔리지만 그녀에게 전화 한 통만 하자고 연락하고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아니 어쩌면 불편한 마음을 숨기려 평소처럼 전화를 대화를 나눈다.

'나'는 그제야 본인의 입으로 말한다.

'그동안 미안..'

-'아니야..'


그 후,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에게 연락한다.

이젠 이미 말해버린 이상, 감정 표현에 더 솔직해졌다.

'보고싶다'

그동안 이 말을 못해 너무 힘들었던 '나'였다.


허나, 그녀에게 '나'의 연락은 여전히 불편하다.

그녀에게 '나'는 그저 좋은 친구일 뿐이다.


그렇게 오늘.

그녀는 '나'에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는다.

'아직은 누굴 만날 생각이 없다, 너와는 좋은 친구로만 지내고 싶다'



차라리 영화였다면, 이렇게 끝나버려도 좋을 것 같다.

결말이 이상하다며 관객들이 비난하더라도

이후의 이야기는 떠올리지 않아도 되니까.


현실은 그대로지만 '나'의 세상이 끝났다.

각본 속 '나'로 살던 난, 이제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현실 속에 내가 있을 자리가 있을까. 이대로 버텨낼 수 있을까.

10년 전에 그랬듯, 또 긴 시간을 스스로 쌓아 올린 성 안에서 지내야 하는 건 아닐까.



차라리 영화였다면, 해피엔딩으로 끝낼 수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