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속초 아바이 순대촌 길목에 들어섰다. 연휴를 즐기려는 관광객들이 길을 따라 넘실거린다. 가벼운 마음으로 들렀다가 뜻하지 않은 인파 속에 휩싸이며 무슨 축제장에라도 온 것 같은 분위기에 함께 젖어 든다.
한참을 헤매다 도착한 ㅇㅇ 순댓국집 앞. 이곳은 다른 집보다 긴 줄이 끝이 없다. 도대체 순대가 무슨 맛을 내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길에 세워 두는 것인가. 보이지도 않는 앞을 보니 내리쬐는 햇볕 아래서 기다릴 일이 엄두가 나지 않는다. 지나오다 스친 외진 곳으로 가는 것이 어
냐는 의견을 조심스레 내어본다. 그래도 나선 김에 유명한 집에서 먹어보자는 아이들 의견이 우세다. 자식 따라 다니며 나이 든 고집은 금물이라는 것을 알기에 얼른 생각을 바꾸고는 시선을 주변으로 돌린다.
번호표를 손에 들고 빈자리가 나오길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이 나름 즐거워 보인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무엇이 재미있는지 킥킥 웃는 사람, 다리가 불편한 부모님을 양쪽에서 부축하고 있는 자식들이 무어라 살갑게 나누는 표정, 두 손 맞잡은 연인들의 사랑스러운 눈빛의 대화가 보기 좋다.
드디어 줄이 줄어들어서 문안으로 들어섰다. 뜨거운 국물을 후후 불며 먹는 이들의 얼굴빛에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내 눈에는 마치 그들이 로또라도 당첨된 사람들 같다. 번호판은 딩동딩동 연신 다음 차례를 불러내고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행운의 번호 당첨 확인하듯 고개를 빼고 번호표와 맞춰본다.
식당 안을 둘러본다. 주방에서는 가스 불판 위에 죽 늘어선 뚝배기들이 연신 김을 뿜어내고 조리사의 얼굴에선 땀이 소나기처럼 흘러내린다. 연신 목에 두른 수건으로 훔쳐 내는 모습이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대장간의 풀무질이 겹쳐지며 괜스레 미안해진다. 이렇게 누군가의 수고로 한 끼 식사를 편하게 할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마저 든다.
어렸을 때 동네에 잔치가 있거나 초상이 나면 돼지를 잡았다. 별 볼거리가 없던 그 시절 아이들에게는 그런 일들이 구경거리였다. 빙 둘러 쪼그리고 앉아 아저씨의 움직임 따라 요리조리 비켜 가며 날렵한 손놀림에 정신을 팔다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남녀노소가 어우러진 분잡함 속에서 아주머니들은 손질해 준 내장으로 순대를 만드느라 부산하게 움직였다. 우리는 그것 한 점 얻어먹으려고 쭈뼛쭈뼛 주위를 떠나지 못하고 어정거렸다. 고기 맛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재수가 좋으면 한 접시를 받을 때도 있었는데 벌떼처럼 우르르 달려들어 재빠르게 하나 집어 게눈 감추듯이 꿀꺽하며 즐거워했다.
뚝배기를 한 쟁반 들고 가는 총각의 두 팔에 힘줄이 태백산맥처럼 불끈 솟아 꿈틀거린다. 저 힘줄 밑에는 가족들의 젖줄이 숨 가쁘게 흐르고 있으리라. 순대의 옛 맛이 혀끝에 맴돌며 침이 고이고, 꼬질꼬질했던 나의 시골뜨기 모습이 그 위에 겹쳐진다. 나는 순대 하나 입에 넣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기다렸고, 지금 순대를 나르는 총각은 손님의 열기와 가족의 무게에 맞서느라 온 힘을 팔뚝에 모은다.
드디어 우리 번호가 뜬다. 자리에 앉자 금방 순대 한 접시가 나온다. 속초 별미인 가자미식혜와 새우젓에 찍은 순대를 한 입 쏘옥 넣는다. 육지와 바다의 만남이 입 안에서 오묘한 맛을 내며 살살 녹는다. 역시 긴 시간 기다린 보람이 있다. 어려서 먹던 그 맛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뒤이어 펄펄 끓는 순댓국이 앞에 놓인다. 들깨 가루를 한 숟가락 풀어 얼른 수저를 들고 한 입 뜨다가 맞은편 자식들에 둘러싸여 편안한 웃음을 짓는 노모와 눈이 마주친다.
순간 친정 엄마의 주름진 모습이 노인의 머리 위로 영상처럼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엄마를 모시고 음식을 먹으러 가 본 기억이 없다. 자주 볼 수 있는 기회도 없었지만, 그때만 해도 적은 월급으로 애들과 산다고 외식은 아예 생활 속에 없었다. 한때 엄마가 우리 집에 계신 적이 있었지만 일을 하느라 바빠서 도리어 도움을 받기만 하고 밖에 나가 밥 한 그릇 사 드리지 못했다. 떠나시는 날 아침, 딸 바쁘다며 설거지를 하다가 차 시간에 쫓겨 물기도 채 못 닦고 옷에 슥슥 문지르며 나가던 모습이 내내 눈에 밟히곤 했었다. 불효자였던 내가 염치도 없이 혼자 자식들에게 효도를 받는 것 같아 일순 엄마에 대한 미안함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죄스러움 속에서 순댓국 한 그릇을 비운다. 애잔함 속에서도 비어있던 뱃속이 채워지자 느긋해진다. 이 순간, 이 공간 안에서는 먼저 차지한 식탁 한 귀퉁이가,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순댓국 한 그릇이 세상 어느 것보다 귀할 것이라 생각해 본다. 긴 기다림이 아니었다면 깨우치지 못했을 소중한 경험이다. 작은 식탁 하나 차지하고 국밥 한 그릇을 비우고 나니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여유로움을 어디에서 쉽게 얻을 수 있을까.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밖에서 자리 나길 기다리던 아주머니가 느닷없이 나를 보고 존경스럽다고 말한다. 나도 밖에서 기다릴 때는 그런 마음이 들었었노라고 답하며 서로 크게 웃어젖힌다. 옆에 아저씨는 권리금 받고 나오지 그냥 나오느냐며 농을 건넨다. 또 한 번 박장대소한다. 두 분께 맛있게 드시라며 인사말을 건네고 나는 무슨 큰일이라도 해낸 듯 의연히 그곳을 빠져나온다. 그들은 이 순간 고급 차, 큰 집, 자식 걱정 그 어떤 근심거리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식탁 앞에 놓여 질 순댓국 한 그릇에 집중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세상의 전부인 양.
그렇다, 세상사는 일이 하루하루 녹록지 않다지만 그 속에서도 생각 하나 바꾸면 삶의 치열함이 평온함으로 변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작은 공간에서 순댓국 한 그릇을 가지고 생면부지인 사람들과 교감하며 따뜻함을 나눌 수 있는데 무엇에 마음을 뺏겨 온 생을 힘들게 살 것인가.
순댓국 한 그릇에 작은 행복을 맛본 소중한 시간이다. 욕심을 거두고 소소한 것들에게서 삶의 의미를 찾아 남은 생을 즐겨보리라. 식당을 뒤로하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가볍다. 파란 하늘의 흰 구름이 더 정겨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