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세 젊은 나이에 오 남매 자식을 두고 가족을 위해 평생 노력하시며 살아오신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야속할 만큼 화창하던 5월에 아카시아 꽃이 만발하고 온 세상이 푸르던 날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의그날
모습을 눈물로 회상하며 가사를 적었다.
오 남매 자식들 정성으로 챙기시며 평생 가족 위해 희생하신 아버지의 삶의 이야기를 슬픔과 그리움을 담아 노래한다.
아버지가 살아생전 자기 이야기를 글로 쓰기를 바라셨고 트롯을 즐겨 부르시던 아버지에게 늦었지만이 노래를 선물로 드리려고 한다.
해마다 아카시아 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 되면 꽃향기를 맡으며 꽃이 질 때까지 마음 한편이 아려왔다.
이젠 슬픔을 딛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소중하게 기억하기 위한 인생곡을 담아 보았다.
아버지는 어릴 적 공부를 참 잘했다고 했다. 공부를 더 하고 싶어도 가정 형편상 학교를 다닐 수 없어서중학교를 겨우 졸업했다.
아빠는 철도에 근무하셨다. 29살에 집안의 소개로 9살 차이의 엄마를 만나서 결혼을 했다.
결혼 후 첫째 언니가 태어나면서 박봉의 공무원을 그만두고 돈을 벌기 위해 장사를 시작했다.
자전거를 끌고 생선 장사를 하셨다.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면서 성실하고 열심히사셨던 아버지는 자전거에서 그다음에는 포터 트럭에 건어물, 해물, 야채, 생선등을 싣고 새벽 일찍 장사를 나가셨고 깜깜한 밤이 되면 돌아오셨다.
물론 장사하러 멀리 있는 시골을 갈 때에는 엄마도 따라가는 날도 있었고, 옛날에는 돈 대신 쌀로 물건값을 대신해서받아오곤 했었다.
2일과 7일 장날에는 그동안 물건값 대신 받아온 쌀과 여러 곡물들을 자루에 담아 한말, 두말씩 담아 시내 장날에 쌀을 팔러 나가셨다.
가끔씩 나는 초등학교 시절 아빠를 따라쌀을 팔러 가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그때 당시 쉬는 날은 장날이었다. 장사를 가지 않고 5일 동안 받아온 곡식들을 마당에 펼쳐서 대로 담아 한말씩 자루에 담았고 건어물을 대량으로 사가지고 와서 집에서 펼쳐놓고 봉지에 소분하며 5일 동안 팔 물건을 준비하는 일을 함께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도 늘 아버지 일을 보조하는 담당은 나였다. 어릴 적 왜 맨날 나만 시키냐고 투덜 되었지만 밑으로 동생들이 어렸고 언니보다는 내가 더 억센 성격이라 그 역할은 내가 가장 잘했던 것 같다.
늦은 밤 장사하시고 밤늦게 들어오시는 소리가 나면 나는 어릴 적에도 밖에 나가서 아빠가 가지고 오는 쌀자루를 받고 물건을 내려주는 속 깊은 딸이었다.
성실하던 아버지는 장사를 하시면서도 그때 당시 우리 가족이 편하게 살 양옥집을 짓고 팔며 살림을일구어 나가시는데 애쓰셨다.
시간이 지나 드디어 안동 시내 신시장에 좋은 가게 자리가 나와서 생선가게를 차리게 되었다.
아빠는 그 생선가게에 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 4시 정도면 장사를 나가셨고 늘 늦은 밤 10시가 넘어서집으로 돌아오셨다.
아버지는 피곤하신데도 누구 하나 깨우지도 않고 손수 밥을 차려드시기도 하셨다. 매일 같이 새벽 일찍가게를 나가시며 늘 가족 위해 애쓰시는 아버지셨다.
장사를 하시면서도 딸들이 필요하다는 것이 있으면 속옷까지 챙겨서 사주시고 늘 맛있는 것이 있으면자식먼저 챙겨주시고 먹는 것은 잘 먹어야 한다며 오 남매를 모두 데리고 주기적으로 시내 중심에 있는 갈빗집 식당에도 자주 데리고 가 주셨다.
여름이 되면 가족들과 바닷가며 여기저기 소풍도 다녔고 아무리 고단하여도 늘 집에 와서 가족과 함께 하는 다정한 아버지였다. 또한 시골에 살고 있는 사촌 오빠들이 중학교 고등학교 다니기가 힘들어 시내에 살고 있는 우리 집에 자취를 할 수 있게 아랫채를 지어 방도 내어주셨고 온 가족을 두루 살펴 주시는 인정많은 분이셨다.
그동안 열심히 사셨고 자수성가로 여유 있게 살아도 되는 시간이 왔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뇌출혈이 오셔서 수술을 했고 중환자실에서 머무르는 기간 동안 엄마는 장사를 해야 해서 언니와 내가 회사를 다니면서교대하며 아버지를 병간호했다.
퇴원 후 뇌출혈로 인해 한쪽 수족이 마비가 와서 장사는 하실 수가 없었고 집에서 매일 물리치료를 다니며 병원통원 치료를 받아야 해서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아빠를 보살필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언니가 조카를 임신해서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결혼식을 불편한몸으로 참석하셨고 결혼식 후 집에 돌아오셔서 펑펑 우셨던 모습이 기억난다.
딸을 일찍 시집보내는 것이 속상하고 당신 몸이 불편한 상황에 결혼식을 해야 하는 것을 엄청 자존심 상해하셨다.
우리 아버지는 꽃과 식물을 좋아하셨다. 아프시기 전 일찍 운전면허를 딴 나에게 직접 운전연수를 시켜주셨기에 나는 아픈 아버지를 차에 태우고 병원도 모시고 다닐 수가 있었고 함께 활짝 핀 철쭉꽃을 구경하러 여기저기 다녔었다.
딸들과 불편한 몸이지만 다행히 대화가 되었기에 나름 힘든 시절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무척 행복하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러던 5월 어느 날 밤에 아빠가 감기가 걸리셨는지 기침을 심하게 하시더니 객혈을 하셨다. 밤새 아버지의 객혈을 작은 바가지에 받아내며 아침이 되면 병원을 간다고 생각하고 그 밤을 힘들게 버텼다.
다음날 아침 일찍 병원에 갔고 진찰을 한 의사 선생님이 당장 입원을 하라고 하셨다.
가슴소리가 많이 안 좋다고 하시며 위험하다 하셔서급히 입원을 했고 장사를 끝마친 엄마가 저녁에 병원으로 왔다.
나는 고3이던 여동생을 데리러 가야 해서 아버지한테 내일 아침에 일찍 오겠다고 하고 나가려는데아버지는 나보고 병원에 있고 엄마를 집에 보내라고 했다. 그 말이 마지막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고 "아빠 내일 아침에 일찍 올게요!"라는 말을 하고 급히 병원을 나왔다.
그날 밤 야간자율학습을 마친 여동생을 데리고 와서 전날밤을 꼬박 새운 터라 너무 피곤해서 침대에 쓰러져 있는데 소쩍새 울음소리가 그날밤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밤 12시가 다 되어갈 때쯤 그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엄마는 전화로 "아빠가 돌아가셨다"라며 흐느끼며 울었다.
지금 생각하면 충격이 너무 커서 어떻게 병원으로 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에는 피가 흠뻑 묻은 흰 이불에 아버지의 얼굴이 덮여 있었고 아버지는 그날밤그렇게 우리들 곁을 떠나셨다.
그날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 나이 54세, 45살이던 엄마, 언니는 25살이었고 조카를 놓고 두 달이 넘은 상태였다. 내 나이 23살, 22살 남동생은 의경으로 부산에 있었고, 19살 고3이던 여동생과 17살 고1이던 막내 남동생 이렇게 오 남매였다.
급히 돌아가신 아버지를 산에 묻던 그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었고 주변 산에는 아카시아 꽃이 만발했고 조용한 산에 아버지 묘 땅을 파는 포클레인 소리와 함께 숲 속에 뻐꾸기 소리가 크게 들렸다.
살아온 인생을 말해주듯 너무 좋은 그날의 날씨가 아버지의 삶을 대신 말해주는 듯했다.
오 남매를 두고 가시는 아버지께서는 당신도 그렇게 그 먼 길을 급하게 가실 줄 몰랐을 텐데 얼마나 놀라고 아팠을까 하는 생각이 들며 내가 엄마가 되고 아버지 나이인 50대가 되어보니 더더욱 맘이 아려온다.
아버지 돌아가신 5월에 아카시아 꽃이 활짝 피는 때가 되면 꽃이 지고 사라질 때까지 마음이 울렁거리고 속상하고 눈물이 난다. 그래서 만든 아버지의 노래 제목을 "슬픈 아카시아"라고 지었다.
우연한 기회에 시작한 트롯 만들기 시간에 아버지에 대한 노래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눈물을 펑펑흘리며 그때를 기억하며 시를 썼고 다시 가사로 고쳐 쓰며 작사, 작곡, 노래까지 모두 직접 완성했다.
돌아가시고 몇 해 뒤 산속에 계시던 아버지를 구미와 가까운 선산공원묘지로 이장해서 경치가 아주 좋은 위치에 아버지를 모셨었다.
노래가 발매되기 전 아버지 묘에 찾아가서 그 노래를 틀어 드렸다.역시 아버지를 위한 그리움을 담은 노래라서 남편은 공원묘지곡으로 듣기에 아주 좋은 노래라며 슬퍼하는 나를 위로하듯 말을 건넨다.
" 아버지 그렇게 좋아하던 23살 둘째 딸이 벌써 50이 넘은 나이에 아버지를 기억하며 아주 오랜만에 선물을 준비했어요! 마음에 드시죠? "
훗날 만나 좋아하던 꽃바구니 담아서 효도여행 아카시아 가득한 곳 함께 가요! 그날까지 행복하게 아버지 기다려요~(슬픈 아카시아 노래가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