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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저녁이었다.
지방에서 자취하며 혼자 사는 딸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딸은 한의대생이다. 뭔가 멋있고 진지해 보이는 직업을 준비하는 학생 같지만, 막상 통화 내용은 늘 비슷하다. "힘들어, 시간이 없어, 왜 세상은 나한테만 가혹한가" 같은 테마의 변주곡.
이번 테마는 시험 이었다. 시험 기간의 딸은 평소보다 3배 정도 비장한 어조를 사용하고, 가끔은 5배 정도 예민해진다.
"시험공부할 것도 많은데 EBS 튜터링 알바도 병행해야 해서 시간이 모자라요."
하며 우는 소리를 한다.나는 듣다가 그만
"그럼 알바를 그만둬라." 라고 말하고 말았다.
잠깐의 침묵. 그리고 폭발.
"엄마,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짜증이 묻어나는 딸의 목소리를 들은 그 순간 나는 전화를 든 손을 바라보았다.
손은 아무 문제 없었다. 하지만 마음은 괜히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알고 있다.
우리 집 형편이 넉넉하지 않다는 것. 부모가 고생하며 일한다는 걸 딸도 알고 있다.
그러니까 딸은 자기 나름대로 '부담을 덜어주겠다'며 알바를 하는 중이다.
그래서 서운함과 미안함이 동시에 밀려오는 건 좀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감정은 늘 그렇게 불공평하다. 현실은 언제나 균형을 맞추지 않는다.
"알겠어. 공부 열심히 해."
나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내가 돈을 많이 벌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인생이란 대체로 이런 식이다.
다음 날, 나는 식당에서 일하고 있었다.
해야 할 일을 대충 마치고, 손님이 없어서 문 앞 의자에 앉아 밖을 보았다.
거리는 조용했다.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마치 영화에서 소품 담당자가 '이 타이밍이야!'라고 밀어넣은 것처럼, 로또 종이 한 장이 바람을 타고 내 다리 근처로 날아왔다.
"누가 꽝이라고 버렸나 보네."
그렇게 말했지만, 사람은 참 이상한 동물이라서, 버리기 전에 한 번은 확인해본다.
핸드폰을 꺼내 QR코드를 찍었다.
미추첨 번호.
오늘이 발표 날.
작은 심장이 쿵, 하고 뛰었다.
새삼스레 종이를 자세히 살펴 보았다. 번호 한 줄. 1000원짜리. 참 소박하다. 하지만 기적은 늘 이런 소박한 얼굴을 하고 온다고들 하지 않나?
어제 딸과의 통화가 떠올랐다. 이건 하늘이 내게 주는 선물 같은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만약 이게 1등이라면?
그럼 이걸 잃어버린 사람은 얼마나 억울할까?
나는 죄책감에 괴로워해야 하나? 아니면 기쁨에 취해 춤을 춰야 하나?
둘 다는 안 되겠지.
아마 나라는 인간은 그렇게 멀티태스킹이 뛰어나지 않을테니.
종이를 반듯하게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기대 51%, 걱정 49%의 비율이었다.
그리고 일을 했다.
10시, 퇴근.
집에 돌아와 핸드폰 카메라를 QR코드에 갖다 댔다. 공기가 살짝 떨리는 것 같았다. 큰 기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약간의 떨림은 있었다.
화면에 결과가 떴다.
꽝.
화면은 조용히 진실을 알려주었다.
기적은, 적어도 오늘은 내 차례가 아니었다.
나는 한참 종이를 보다가 결국 웃고 말았다.
참, 인간이라는 존재는 재밌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고, 그러다 스스로에게 속고, 그리고 또 내일을 산다.
혼자 소설을 써놓고 주인공이 되려 했던 건 나였다.
하지만 뭐, 바보 같은 건 또 그렇게 나쁘지도 않다. 바보가 된다는 건, 희망을 잠깐이나마 믿었다는 뜻이니까.
그렇게 말해놓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인생이라는 건 대체로 이런 식이니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묘한 일이다.
로또 한 장이 바람에 날아와 내 발밑에 떨어졌다는 것. 그게 하필 당첨 발표날이었다는 것.
그리고 내가 그걸 줍게 되었다는 것.
우연일까, 필연일까.
아니면 그저 바람의 장난일까.
결과는 꽝이었지만, 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꿈을 꿨다. 딸에게 "알바 그만둬도 돼"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을. 돈 걱정 없이 공부만 하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을.
그게 1등보다 더 값진 거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이건 좀 억지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그 로또 용지를 버리지 않고 서랍 깊숙이 넣어뒀다.
언젠가 딸에게 이 이야기를 해줄 날이 올까.
"엄마가 말이야, 하루 동안 억만장자가 될 뻔했어."
그러면 딸은 웃으며 말할 것이다.
"엄마,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래, 말이 안 되는 소리지. 하지만 그 하루만큼은 진짜였어."
그리고 덧붙일 것이다.
"뭐, 인생이라는 게 대체로 이런 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