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에 남은 그림자

꿈과 현실 사이에 머물던 짧은 온기

by 캔디는외로워

바닷가 쪽에서 작은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먼 거리에서도 그 소리는 파도와 섞여 천천히 번졌다가 사라지곤 했다.
햇빛은 아직 어딘가 서늘했고, 공기에는 물기 어린 향이 배어 있었다.
나는 그 흐름에 이끌리듯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자, 갑자기 공간이 고요해졌다.
조금 전까지 모여 있던 이들은 어느 순간 흔적을 감추듯 사라져 있었고, 그 빈자리의 한가운데에 배우 L이 서 있었다.
바다는 그의 옆에서 부드럽게 움직이며 빛을 흩뜨렸다.
물결은 모래에 닿을 때마다 얇게 부서지고, 그 위로 비친 햇빛은 길게 흔들렸다.

L은 바다와 한 풍경인 듯 조용히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그의 외투 끝이 가볍게 흔들리고, 그 미세한 흔들림은 파도의 호흡과도 닮아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다가 어느 정도 거리쯤에서 멈춰 웅크리고 앉았다.
모래는 손바닥에 닿자마자 천천히 흐트러지며
형태를 남기지 않는 부드러운 감촉만 슬며시 남겼다.

한참 후에야 L이 고개를 돌렸다.
햇빛이 그의 눈가를 스치며 잠깐의 반짝임을 만들어냈다.
특별히 웃는 것도, 놀라는 것도 아닌 불필요한 말을 건네지 않아도 이미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의, 잔잔한 여유가 어려 있었다.

“쉬시는데… 죄송해요. 팬이에요.”
작게 내뱉은 말은 바닷바람에 한 번 흔들린 뒤에야 그에게 닿는 듯했다.

L은 부드럽게 웃었다.
파도가 모래를 가볍게 쓰다듬고 돌아갈 때의 잔향처럼, 그 웃음은 짧지만 오래 머물렀다.
그는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햇빛과 바람이 겹쳐진 듯, 따뜻함과 차가움이 동시에 스며드는 손길이었다.

“아이, 귀여워.”
그 말은 묘하게 느린 속도로 흘러 들어와 천천히 가라앉았다.

“밥 먹으러 가자.”

그는 내 손을 잡았다.
손과 손이 닿는 순간, 잔잔한 물결이 발목을 스치는 듯한 감촉이 스며들었다.
우리는 말없이 같은 방향으로 걸어갔다.
해변의 소리, 바람의 흐름, 걸음의 리듬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어디에도 모서리가 없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식당 근처에 다다를 무렵, 뒤에서 누군가 L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는 바람과는 다른 결로 흔들리며 우리 주위를 감싸고 있던 고요를 천천히 깨뜨렸다.

잠시 후 사람들의 기척이 다시 모여들었다.
L은 자연스럽게 내 손을 놓고, 동료와 잠시 말을 나눈 뒤 서서히 사람들 무리 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손이 빠져나가는 동작조차 물속에서 천천히 가라앉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나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물결 너머에서 바라보듯 한동안 지켜보았다.
그 즈음에서 꿈은 끝났다.

눈을 떴을 때,
방 안의 공기는 꿈속의 바다를 조금 닮은 듯 조용하고 투명한 결을 머금고 있었다.
기뻤다.
현실에서는 쉽사리 스쳐 지나가지 않는 사람이 꿈속에서는 이렇게 가깝게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이.

나는 잠시 누워 꿈의 잔상을 천천히 떠올렸다.

그러다 문득, L은 나를 어떤 모습으로 보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일었다.
지금의 나였을까, 아니면 오래전 바다를 더 가깝게 느끼던 시절의 나였을까.

아무리 떠올려도 꿈속의 나는 파도에 비친 그림자처럼 흔들렸고
선명한 윤곽을 붙잡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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